"유진아, 엄마가 하는 말 꼭 명심해야 한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는 재능을 드러내지 말아야 할뿐더러, 예쁜 얼굴을 누구에게도 보여줘서는 안 된다."
15년 동안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을 하루도 잊지 않은 이유진은 집에서까지 못생긴 분장을 하며 어리숙한 연기를 해왔었다.
오늘은 그녀의 스무 번째 생일로, 드디어 못생기고 자신감 없는 모습을 벗어 던지고, 진정한 그녀의 모습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
욕조에 따뜻한 물을 가득 채운 그녀는 약물을 부은 후, 화장을 지우는 도구들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 흉측하기 그지없는 화장을 씻어내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기 위해 옷을 벗으려는 순간, 그녀의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한껏 짜증이 치민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방문을 열어야만 했다.
방문을 열자 가정부 윤 아줌마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문에 기대 서 있었다. "이유진, 창고에서 혼자 숨어 뭘 하려는 거야? 오늘 하나 아가씨 결혼식인 거 잊었어? 네가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으면 사람들은 네가 심씨 가문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오해할지도 몰라. 그러니 지금 당장 거실로 내려와!"
윤 아줌마의 말에 이유진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가정부로 고용된 사람이 모시는 아가씨를 대하는 태도가 거만하기 그지없었으니 말이다. 창고에 숨은 쥐새끼 취급을 하다니. 그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창고 방에 숨어 지낸 지 십오 년이 지났는데 말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계모 허수빈은 아버지와 밖에서 몰래 낳은 사생아 심하나와 함께 심씨 가문에 들어와 지내며 안주인 행세를 했다.
더욱 황당한 사실은 이유진의 아버지 심현준마저 그녀를 무시하며 딸 취급조차 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옷만 갈아입고 내려갈게요."
그녀의 담담한 반응에 윤 아줌마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비웃음을 터뜨렸다. "왜 옷을 갈아입겠다는 거지? 아무리 예쁜 옷을 입어도 못생긴 얼굴이 예뻐지지 않을 텐데. 김씨 가문 사람들이 이미 도착했으니 빨리 내려와. 구청 직원들도 이미 도착해서 김 대표와 하나 아가씨의 혼인신고 서류를 작성하고 있으니까. 사모님은 이 아름답고 중요한 순간에 모두가 참석하길 바라고 있어."
그 말에 이유진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김씨 가문은 A시에서 가장 유망한 가문이며, 김씨 가문의 상속자 김도준은 사업 수완이 무척이나 뛰어난 사람이다.
심하나는 사교계에서 일찍이 이름을 알린 관계로 두 사람의 약혼 소식은 뉴스에도 몇 번이나 보도되었다. 사람들은 그런 두 사람을 천생연분에 완벽한 커플이라고 부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인터넷에도 두 사람의 약혼 소식이 파다하게 퍼졌고, 모두가 성대한 결혼식만 기다리고 있었다.
허수빈은 말만 번지르르하게 했지만, 이유진은 그 속에 숨은 뜻을 바로 알아차렸다. 허수빈은 단지 심하나의 빛나는 순간을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이유진은 옷을 갈아입고 윤 아줌마를 따라 거실로 내려왔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장식품을 곳곳에 치장한 오늘의 심씨 가문은 심하나의 약혼식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화려하게 차려 입고 참석한 손님들 사이로, 색이 바랜 흰색 티셔츠에 찢어진 청바지, 흉측한 화장을 하고 나타난 이유진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누가 보아도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분위기를 깨뜨리고 있었다.
김도준의 할아버지 김권호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허수빈은 이유진이 거실로 내려온 모습을 보고 자리에 멈칫하더니 이내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진아, 왜 아줌마가 선물한 드레스를 입지 않은 거야?"
이유진은 허수빈이 그랬던 것처럼 내키지 않은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척 허수빈의 장단에 맞췄겠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허수빈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그녀는 김씨 어르신을 향해 돌아서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김권호는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유진이는 유진이만의 스타일이 확고하구나."
이유진은 머쓱한 얼굴로 폭탄 머리에 가까운 가발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위압감 넘치는 어르신이 이토록 관대한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 적어도 그녀에게 상처가 되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김권호의 곁에 선 남자에게로 향했다. 거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그녀는 그의 몸에서 풍기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그가 대중 앞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김씨 가문 상속인 김도준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김도준을 보니 또 다른 매력이 풍겨났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과 날렵한 턱 선은 마치 로맨스 소설 주인공을 연상케 했다. 이유진은 그의 잘생긴 얼굴에서 한참이나 시선을 떼지 못했다.
"유진이 좀 보세요." 그때, 윤 아줌마가 일부러 큰 소리로 그녀를 비웃기 시작했다. "자기 못생긴 얼굴은 생각하지도 않고 하나 아가씨의 약혼자를 쳐다보며 침을 흘리고 있으니. 우스워죽겠어요. 그 얼굴에 김 대표님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조차 범죄 아닌가요?"
윤 아줌마는 분명 허수빈의 지시를 받고 일부러 비아냥거리는 것이 확실하다.
심하나는 이유진은 그녀의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듯, 일부러 김도준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 "괜찮아요. 도준 씨가 이렇게 대단한데, 여자들이 도준 씨를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죠."
심하나는 이유진을 경쟁 상대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뿐더러, 이유진을 발 아래에 두고 짓밟아 우월감을 느끼고 싶었다.
심현준은 그런 이유진을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돌아보며 화를 냈다. "쓸모 없는 것, 썩 꺼져!"
긴 다리를 이용해 의자를 앞으로 끌어당긴 이유진은 무감한 얼굴로 김도준의 바로 앞에 앉았다.
그녀의 예상외의 반응에도 김도준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했다.
김권호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구청 직원들을 돌아봤다. "빠진 서류가 없는지 꼼꼼하게 확인 부탁하네."
"네, 어르신." 구청 직원은 빠르게 컴퓨터를 열어 중요한 서류가 빠지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곧바로, 직원 중 한 명이 흠칫 놀라는 것 같더니 주저하며 김도준을 쳐다보는 것이다. "김 대표님, 시스템에 따르면 대표님은 이미 결혼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김 대표님의 아내 분은 이유진 씨로 확인됩니다."
"잠, 잠시만요. 뭐라고요?" 넓은 거실에 숨 막힐 듯한 고요함이 밀려왔다.
이유진도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결혼을 했다니? 게다가 상대는 김도준이라고? 당사자인 그녀는 왜 아무것도 몰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