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 그룹 이사회 회의실의 묵직한 참나무 문이 세차게 열리자, 마호가니 테이블 위의 크리스털 잔들이 파르르 떨렸다.
문가에 하선우가 서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창백했고, 늘 따뜻하고 부드럽던 눈동자는 얼음 조각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앉아 있는 테이블 상석으로 똑바로 걸어갔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파혼하고 싶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감정 한 점 없이 메말라 있었다. 선우 그룹과 도윤 그룹의 합병을 논하던 조용한 대화의 흐름이 그 한마디에 끊어졌다.
아버지 하진성 회장이 딸을 빤히 쳐다봤다. "선우야, 무슨 소리냐? 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 곧 강도윤 군도 도착할 거다."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아니에요." 그녀는 회의장에 모인 가족들을 차갑게 훑어보며 말했다. "저는 강도윤 씨와 결혼하지 않겠습니다."
"이건 너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야, 선우야." 아버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건 10년 동안 준비해 온 합병에 관한 문제다. 우리 가문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그녀가 그와 이복동생의 불륜 사실을 추궁했을 때, 그녀의 지난 삶은 끝났다. 그 대화는 험악해졌고, 혼란 속에서 그녀의 작업실에 불이 났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그가 자신을 불길 속에 버려두고 떠났을 때의 타는 듯한 고통, 그리고… 칠흑 같고 고요한 심연이었다. 오늘 아침, 햇살이 비치고 새가 지저귀는 가운데 자신의 침대에서 숨을 헐떡이며 깨어나기 전까지는. 달력은 2년 전의 날짜를 가리키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두 번째 기회였다.
불길이 떠올랐다. 폐를 가득 채우던 매캐한 연기, 살갗을 태우던 지독한 열기. 어린 시절부터 사랑했던 약혼자, 강도윤을 부르짖던 기억이 생생했다.
그는 거기 있었다. 불길에 얼굴이 환히 비친 채 작업실 문밖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있던 건 이복동생, 윤주아였다.
"도윤 오빠, 제발! 나 좀 구해줘!" 목이 쉬어라 절규했다.
주아는 거짓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의 팔에 매달렸다. "도윤 오빠, 너무 위험해! 오빠가 다쳐! 어서 가야 해!"
그리고 그는 그 말을 들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선우를 돌아봤다. 그의 눈에 서린 연민은 그 어떤 불길보다도 그녀를 깊이 아프게 했다. 그는 몸을 돌려 달아났고, 그녀를 죽음 속에 버려두었다.
기억이 너무도 생생해서 속이 뒤틀렸다. 그것이 그녀의 온화한 성품에 대한 대가였다. 그것이 그녀의 조건 없는 사랑에 대한 보상이었다.
"그는 날 사랑하지 않아요." 선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섬뜩할 정도로 차분했다. "그는 주아를 사랑해요."
테이블 건너편에서 누군가 숨을 들이켰다.
이복동생 윤주아가 고개를 들었다. 크고 순진한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언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도윤 오빠는 언니를 정말 아끼잖아. 나는… 나는 그냥 언니 동생일 뿐인데."
"네까짓 게 감히 내 동생 행세를 해?" 마침내 선우의 목소리에 분노의 균열이 일었다.
"하선우, 그만해라!" 하진성 회장이 테이블을 손으로 내리쳤다.
주아는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 집안 남자들에게는 언제나 통하는 섬세하고 애처로운 소리였다. "언니 사고 난 뒤로 도윤 오빠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한 시간마다 전화하고. 언니가 새 그림에 쓰고 싶어 하던 한정판 물감 구하려고 밤새 잠도 안 잤단 말이야."
선우는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물감. 그래, 그는 그녀를 위해 물감을 구해줬다.
그리고 주아를 위해서는 희귀한 다이아몬드를 구했다.
"그가 너한테 물감을 줬지?" 선우의 시선이 주아에게 꽂혔다. "그리고 너한테는 뭘 줬니?"
주아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선우는 심플한 검은 드레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고 벨벳으로 된 상자를 꺼냈다. 그녀는 그것을 테이블 위로 던졌다. 상자는 광택 나는 나무 테이블을 미끄러져 아버지 앞에 멈췄다.
그가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물방울 모양 사파이어가 달린 섬세한 은 체인 목걸이가 들어 있었다.
"지난달 기념일에 도윤 씨가 저한테 준 거예요." 선우가 회의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 상자 옆 테이블에 던졌다. 화면에는 사진 한 장이 띄워져 있었다.
강도윤과 윤주아의 사진이었다. 그들은 요트 위에서 석양을 등지고 있었다. 도윤은 주아를 끌어안고 그녀의 목에 키스하고 있었다. 주아의 목에는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물방울 모양 사파이어가 달린 섬세한 은 체인 목걸이.
상자 안의 것과 똑같았다.
"나만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된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이라고 했어요." 선우의 목소리에는 비꼼이 가득했다. "거짓말이었죠."
그녀는 상자를 집어 들었다. "이건 백화점에서 20만 원 주고 산 거예요. 확인해봤어요. 저 사진에서 주아가 하고 있는 건요? 까르띠에 제품이에요. 2억 원짜리죠."
그녀는 싸구려 목걸이를 손가락 사이로 떨어뜨렸다. 목걸이는 테이블 위로 떨어지며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소리를 냈다.
그녀는 자신이 그것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기억했다. 그의 특별한 사랑의 상징이라 생각하며 매일같이 착용했다. 그것이 값싸고 가짜였다는 사실은 쓰디쓴 약이었다.
바로 그때, 문이 다시 열렸다.
강도윤이 뛰어 들어왔다. 머리는 살짝 헝클어져 있었고 넥타이는 느슨했다. 여기까지 뛰어온 듯한 모습이었다.
"선우야, 자기야, 늦어서 정말 미안해. 내가…" 그는 회의실의 분위기를 보고 말을 멈췄다. 휴대폰 속 사진, 테이블 위의 목걸이, 그리고 선우의 얼굴에 서린 표정을 보았다.
"선우야, 이건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그의 목소리는 애원조였다. "설명하게 해줘."
"뭘 설명하겠다는 거죠?" 선우가 물었다. "어느 목걸이가 진짜인지 설명하겠다는 건가요?"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주아가 나지막한 신음을 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나… 어지러워." 그녀가 속삭였다.
순식간에 도윤의 관심은 선우에게서 주아에게로 옮겨갔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공포는 이제 진짜였지만, 그것은 오직 그의 다른 여자를 위한 것이었다.
"주아야!" 그는 그녀에게 달려가 쓰러지는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 왜 그래?"
그는 몇 년간 선우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절박한 다정함으로 그녀를 붙들었다. 그는 결혼하기로 한 약혼녀, 불길 속에 버려두고 온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들을 지켜보는 선우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사랑의 불씨가 차갑고 단단한 재로 변했다. 바로 이거였다. 모두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 장면이 바로 증거였다.
그녀의 결정은 옳은 것일 뿐만 아니라, 그녀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보세요." 선우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이미 선택을 끝냈어요."
그녀는 충격과 서서히 번지는 공포가 뒤섞인 얼굴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저는 파혼하겠습니다." 그녀가 반복했다. "도윤 그룹에서 합병을 위해 선우 가문의 신부가 필요하다면, 주아를 데려가게 하세요. 제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으니까요."
하진성 회장은 딸의 단호한 얼굴과 주아를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도윤의 모습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넋이 나간 듯했다.
"선우야…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자." 그가 더듬거렸다. "다들… 좀 진정할 필요가 있어."
"일주일만 시간을 주시죠." 주아의 어머니이자 그녀의 새어머니가 부드럽게 제안했다. "냉각기를 갖는 거예요. 선우는 지금 감정적일 뿐이에요. 곧 제정신을 차릴 겁니다."
일주일. 그들은 그녀에게 산 채로 불탔던 기억을 잊으라고 일주일을 주었다. 싸구려 모조품에게 자리를 빼앗긴 사실을 받아들이라고 일주일을 주었다.
좋다. 일주일이면 충분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