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녀에게 결혼식과 가족, 그리고 삶을 통째로 선물하고 있었다. 치명적인 유전병이라는 거짓말을 방패 삼아 내게는 결코 허락하지 않았던 모든 것을. 배신감은 너무나 완전해서, 마치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그날 밤, 출장을 다녀왔다고 거짓말을 하며 집에 돌아온 그에게 나는 다정한 아내를 연기하며 미소 지었다.
그는 내가 모든 것을 엿들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가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는 동안, 내가 이미 나의 탈출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그리고 내가 방금 한 통의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을 것이다. 오직 한 가지, 사람을 완벽하게 사라지게 만드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서비스에.
제1화
서혜진과 강태준. 서울의 사교계에서 모두가 선망하는 커플이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있었다. 서울숲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펜트하우스, 어떤 문이든 열 수 있는 이름값, 그리고 명문 사립고 시절부터 시작된 동화 같은 러브스토리까지.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미니멀리즘과 예술 작품으로 가득 찬 그들의 집, 그 닫힌 문 뒤에는 텅 빈 공허함과 침묵만이 존재했다. 아이가 없었다.
혜진이 노력을 안 한 것이 아니었다. 태준이 거부했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희귀한 유전병, 그는 그렇게 불렀다. 그가 몸에 지니고 있다는 시한폭탄. 그가 사랑하는 여자의 임신을 사형 선고로 만들어버리는 저주.
“당신을 잃을 수는 없어, 혜진아.”
그는 목이 멘 목소리로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하곤 했다.
“절대로.”
몇 년 동안, 혜진은 그 말을 받아들였다. 가족을 갖고 싶다는 깊은 열망을 희생할 만큼 그를 사랑했다. 그녀는 모성애를 아트 큐레이터라는 자신의 일에 쏟아부었다. 작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키워내는 것으로 대신하면서.
그러던 어느 날, 최후통첩이 떨어졌다.
태강 그룹의 막강한 총수인 태준의 아버지가 죽어가고 있었다. 소독약 냄새와 오래된 돈 냄새가 진동하는 병실 침대에서, 그는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후계자가 필요하다, 태준아. 강씨 가문의 대는 너에게서 끝나선 안 돼. 해내지 못하면, 회사는 네 사촌에게 넘어갈 거다.”
그 압박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그날 밤, 태준은 혜진에게 한 가지 제안을 들고 왔다.
“대리모.”
그는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유일한 방법이야.”
오랫동안 희망을 포기했던 혜진의 마음속에서 작은 불꽃이 타올랐다.
“대리모? 정말?”
“응. 철저히 의학적인 절차로 진행될 거야. 우리의 배아, 그녀의 자궁. 중요한 건 당신이 모든 면에서 엄마라는 사실이야. 당신에게 닥칠 위험만 피하는 거지.”
그는 모든 것을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장담했다. 일주일 후, 그는 윤아라라는 여자를 소개했다.
첫눈에 알아볼 수 있는, 불안할 정도의 닮은꼴이었다. 아라는 혜진과 같은 검고 물결치는 머리카락, 비슷한 높은 광대뼈, 그리고 에메랄드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혜진보다 십 년은 젊어 보였고, 그녀의 세련된 우아함과는 대조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완벽하지, 안 그래?”
태준이 이상한 빛을 띤 눈으로 말했다.
“업체에서 프로필이 아주 잘 맞는다고 하더라고.”
아라는 조용하고 소심해 보였다. 그녀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의 아파트가 주는 위압감과 그들 자체에 압도된 듯했다.
“이건 순전히 비즈니스 관계야, 혜진아.”
그날 밤, 태준은 그녀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 여자는 그냥 그릇이야.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부모는 당신과 나, 우리야. 이건 우리를 위한 거야.”
혜진은 반평생을 사랑해온 남편을 바라보며,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것이 그녀가 꿈에 그리던 가족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으니까.
하지만 거짓말은 거의 즉시 시작되었다.
‘시험관 시술’ 때문에 태준은 병원에 있어야 했다. 그는 저녁 식사에 빠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저녁 내내 자리를 비웠다.
“그냥 아라 씨 좀 챙겨주는 거야.”
그는 밤늦게까지 문자를 보내며 말했다.
“호르몬 때문에 감정 기복이 심하대. 의사들이 대리모가 안정감을 느끼는 게 중요하다고 하더라고.”
혜진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음식을 만들어 태준 편에 보냈다. 아라를 위해 부드러운 담요와 편안한 옷을 사주며, 이 차가운 계약 관계의 간극을 메우려 애썼다.
그녀의 생일이 다가왔다. 태준은 단둘이 제주도에서 주말을 보내자고 약속했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약속을 취소했다.
“아라 씨가 약물에 부작용을 보이고 있어.”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 너머에서 말했다.
“내가 여기 있어야 해. 정말 미안해, 혜진아. 꼭 보상할게.”
그녀는 혼자 생일을 보냈다. 빵집에서 사 온 케이크 한 조각을 먹으며, 펜트하우스의 정적은 귀가 먹먹할 정도로 시끄러웠다.
결혼기념일은 더 최악이었다. 그는 전화조차 하지 않았다. 자정이 넘어 문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을 뿐이다.
‘병원에 급한 일 생겼어.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혜진은 친구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그의 변명을 늘어놓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 아기를 위해서야. 스트레스가 많은 과정이잖아. 그 사람도 나만큼이나 간절한 거야.’ 그녀는 완벽했던 삶의 가장자리를 해지게 만드는 진실을 외면하며, 그 설명들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것은 비가 차갑게 내리던 어느 화요일이었다. 신호를 위반한 택시가 그녀의 차 옆면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충격은 폭력적이었고, 온몸이 격렬하게 흔들리며 어지럽고 떨렸다. 그녀의 첫 번째 본능은 태준에게 전화하는 것이었다.
전화는 계속 울리다가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태준 씨, 나 사고 났어.”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난 괜찮은 것 같아, 근데 차가 완전히 망가졌어. 혹시… 와줄 수 있어?”
그녀는 기다렸다. 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두 시간. 친절한 경찰관이 견인차를 부르는 것을 도와주고, 검사를 받도록 그녀를 응급실로 데려다주었다. 팔은 삐었고, 몸은 시퍼렇게 피어나는 멍들로 뒤덮였다.
그녀는 차갑고 소독약 냄새 나는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손에 쥔 전화기는 조용했다. 다시 전화했다. 음성 사서함. 또다시. 음성 사서함.
결국 그녀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팔의 둔한 통증은 가슴속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파트는 어둡고 텅 비어 있었다. 불을 켜자 커피 테이블 위에 반쯤 비워진 와인잔이 보였다. 잔 가장자리에는 희미한 립스틱 자국이 묻어 있었다. 그녀의 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합리화하려 애썼다. 그의 친구가 들렀을 수도 있다. 회의가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 심어진 의심의 씨앗은 이제 가시 돋친 덩굴이 되어 그녀의 심장을 휘감고 있었다.
그 주 후반, 태준은 강남의 한 프라이빗 클럽에서 사업 파트너와 친구들을 위한 작은 모임을 주최했다. 삔 팔과 희미해져 가는 멍들을 안고 있는 혜진은 떨쳐낼 수 없는 한기를 느꼈다.
갤러리 미팅 때문에 늦게 도착한 그녀는 프라이빗 룸으로 다가갔다. 낮은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히 들어가려고 문밖에서 잠시 멈췄다.
바로 그때, 그의 목소리가 방 안에서 명확하고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진짜야, 이런 기분은 처음이야.”
태준이 말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가볍고, 그녀가 몇 년 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혜진이랑은… 깊은 사랑, 영혼의 교감 같은 거지. 근데 아라랑은… 불꽃이야. 짜릿하다고.”
혜진은 문고리를 잡으려던 손을 허공에 멈춘 채 얼어붙었다.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의 친구 중 한 명인 민혁이 망설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진짜 이게 좋은 생각이라고 확신해, 태준아? 둘 다 만나는 거? 언젠가 크게 터질 일이야.”
“안 터져.”
태준의 목소리는 혜진의 속을 뒤집어 놓는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혜진이는 아기를 갖게 될 거고, 행복해할 거야. 그리고 내겐 아라가 있겠지. 난 두 사람 모두에게 원하는 모든 걸 줄 수 있어.”
혜진은 발밑의 바닥이 기울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벽에 기댔다. 차가운 나무의 감촉이 달아오르는 피부와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그리고 마지막, 치명적인 일격이 날아왔다.
“아기가 태어나면 유럽에서 아라를 위한 결혼식을 계획 중이야.”
태준은 공모자처럼 목소리를 낮추며 고백했다.
“비밀 결혼식. 우리랑 아라 친구 몇 명만. 이미 꼬모 호수에 있는 빌라에 계약금도 걸었어. 수십억짜리. 그럴 자격이 있어. 아라는 모든 걸 가질 자격이 있는 여자야.”
그가 15주년 결혼기념일에 혜진을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던 바로 그 빌라였다.
메스꺼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다 복도에 있던 장식용 화병을 넘어뜨렸다. 화병은 대리석 바닥 위에서 귀가 먹먹할 정도의 굉음을 내며 산산조각 났다.
안에서의 대화가 멈췄다. 문이 벌컥 열리고, 태준이 서 있었다. 그녀를 본 그의 얼굴은 공포로 굳어졌다.
“혜진아! 여기서 뭐 해?”
그의 친구들이 그의 주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동정과 경악이 뒤섞여 있었다.
혜진은 몸을 바로 세웠다. 충격은 그녀가 가진 줄도 몰랐던 얼음 같은 평정심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대리모와 비밀 결혼식을 계획하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방금 도착했어.”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막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태준의 친구들은 주식 시장에 대해 크고 부자연스러운 대화를 시작하며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태준은 그녀 곁으로 달려와 팔을 잡았다.
“괜찮아? 안색이 안 좋아.”
그의 손길이 낙인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팔을 뿌리쳤다.
“그냥 피곤해서.”
그녀는 텅 빈 눈으로 말했다.
“힘든 하루였어.”
그녀는 그의 너머,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혹시… 오늘 밤 아라 씨도 왔어?”
그 질문은 시험이었다. 한 조각의 정직함이라도 바라는 마지막, 절박한 애원이었다.
태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라? 당연히 아니지. 그 여자가 왜 여기 있겠어? 그냥 대리모일 뿐이야, 혜진아. 도구라고. 기억하지?”
그는 ‘도구’라는 단어를 너무나 경멸적으로, 쉽게 내뱉어서 그녀의 숨을 멎게 만들었다. 이것이 그의 사랑이었다. 이것이 그의 불꽃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도구.”
그녀는 그의 친구들의 충격받은 얼굴이나 그의 광적인 걱정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몸이 안 좋아서.”
그녀는 어깨너머로 말했다.
“집에 가봐야겠어.”
그녀는 클럽을 걸어 나왔다. 그녀의 발걸음은 침착하고 단호했다. 얼음 같은 평정심이 혈관을 타고 퍼져나가며 고통을 얼리고, 그것을 단단하고 날카로운 무언가로 바꾸고 있었다.
청담동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태준이 뒷좌석에 두고 간 태블릿 화면이 켜졌다. 아라에게서 온 문자였다.
‘방금 도착했어, 자기야. 스위트룸 장난 아니다. 자기가 빨리 와서 이 옷 좀 벗겨줬으면 좋겠네. 쇼핑 진짜 미쳤어… 나한테 이렇게나 많이 쓴 거야?’
태준은 이틀간 부산으로 출장을 간다고 했었다.
혜진은 메시지를 쏘아보았다.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눈물 너머로 글자들이 흐릿하게 번졌다. 그는 부산에 없었다. 그는 아라에게 가고 있었다.
그녀는 집으로 가지 않았다. 택시 기사에게 다른 주소를 말했다. 강남에 있는 세련되고 눈에 띄지 않는 오피스 빌딩. 문에 붙은 간판은 간단했다. ‘블랙쉴드 컨설팅.’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확고한 결심을 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알던 인생은 끝났다. 이제 그것을 지워버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