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침대에 누워 그저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그녀는 세상 누구보다 소중하다고 믿었던 남자, 최서강의 본 모습을 알게 되었다.
그때, 간호사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윤신 씨, 면회 시간이 끝났습니다."
최서강은 간호사를 향해 싱긋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기 전, 그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송하린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하린아, 빨리 눈 좀 떠 봐. 네가 다시 돌아오기만 기다릴게. 사랑해."
송하린은 마음속으로 차갑게 비웃었다.
이렇게 훌륭한 연기를 식물인간인 그녀에게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이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러나 병실 문에 기대어 있던 두 간호사는 그의 그럴듯한 연기에 완전히 속아, 황홀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간호사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최서강 씨는 세상에서 제일 완벽한 남자인 것 같아요. 5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식물인간이 된 아내를 이렇게 그리워한다니요."
옆에 있던 또 다른 간호사가 한숨을 내쉬며 맞장구쳤다. "재벌인데다 얼굴도 잘생기고, 그 동안 스캔들 한 번 없었잖아요. 그렇게 접근해 오는 여자들도 많을 텐데 아직도 아내밖에 모른다니… 이런 남자는 정말 드물어요. 송하린 환자는 전생에 얼마나 큰 덕을 쌓았길래 이런 완벽한 남자와 결혼할 수 있었을까요?"
'완벽한 남편?'
송하린은 어처구니없는 실소를 터뜨렸다.
최서강이 그녀를 이용해 회사에서 자기 입지를 다지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의 생육 가치를 빼앗아 그녀가 영원히 병원 침대에 누어 있기를 기도했다는 사실을 간호사가 알았다면 그를 완벽한 남편이라고 했을까?
송하린은 몸에 덮은 이불을 걷어차고 천천히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하지만 5년 동안 침대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몸은 그녀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온몸의 근육은 이미 퇴화한 지 오래여서 두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그녀는 고통을 참고 바닥을 기어 창문에 다가갔다.
병원 건물 앞에는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 차는 과거 결혼기념일에 최서강이 송하린에게 선물로 준 차량이었고, 번호판조차 그녀의 생일 숫자와 같았다.
그날의 송하린은 그의 품에 안겨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서강아, 정말 나를 사랑해?"
최서강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를 품에 꼭 안고 입술에 입을 맞췄다. "바보야, 내가 내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구를 사랑하겠어? 하린아, 난 너를 사랑해. 오늘은 우리가 함께한 첫해니까, 앞으로는 수없이 많은 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정말 사랑이 맞았을까? 그렇다면 사랑을 연기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일까?
그때 송하린은 차 문이 열리며 내리는 임하정을 바라봤다. 하이힐을 신은 그녀는 고개를 곧게 들고 차에서 내렸고, 그 우아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모습은 마치 진짜 최서강의 아내처럼 보였다.
임하정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최서강에게 다가가던 순간, 발이 무엇엔가 걸려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최서강은 그녀가 쓰러지기 전에 허리를 가볍게 붙잡았다.
그리고 송하린은 그때 처음으로, 최서강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누군가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
최서강의 눈에 비친 송하린은 언제나 부서지지 않는 강철 같은 존재였다.고통도, 피로도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그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는 순한 개와도 같았다.
그는 손짓 한 번이면 그녀가 모든 일을 멈추고 달려올 거라 믿었다.
예를 들어, 송하린이 대학을 졸업한 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학 연구소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을 때, 최서강은 직접 그녀를 찾아와 단 한마디를 했다.
"하린아, 난 네가 필요해." 결국 송하린은 공항 탑승구 앞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버리고, 그의 아내가 되는 길을 택했다.
두 사람이 결혼한 뒤, 송하린은 누구보다 성실하게 최서강을 내조했고, 위병이 날 정도로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결국 그녀는 스카이 그룹에서 그의 입지를 단단히 굳히게 해 준 획기적인 신약을 개발해 냈고, 그 덕분에 최서강은 그룹 역사상 최연소 이사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때의 최서강은 평생 그녀만 사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순진한 송하린은 그 한마디를 굳게 믿었다.
지난날의 기억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송하린의 가슴에 박혔고, 그녀는 고통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눈을 감자 눈꼬리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혀에 씁쓸함이 남았다.
임하정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최서강의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송하린은 역겨움에 속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그때, 뒷좌석 문이 벌컥 열리며 송하린이 목숨까지 바쳐 낳은 쌍둥이 최청환과 최진희가 차에서 내렸다.
두 아이는 천사보다 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진희야, 청화야!"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낀 송하린은 당장이라도 유리창 너머로 손을 뻗어 두 아이의 얼굴을 만지고 싶었다.
하지만 두 아이는 임하정의 품에 뛰어들어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는 것이다.
지금, 최서강은 바로 옆에서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들이 진짜 완벽한 가족이라도 되는 양, 다정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말이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송하린의 가슴은 마치 쥐어짜는 듯한 고통으로 조여 왔다.
송하린이 병실 침대에 누워있는 5년 동안, 최서강은 두 아이를 데리고 그녀의 병문안을 온 적이 거의 없었다.
송하린은 임하정이 처음 병원에 찾아왔던 날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임하정은 최청환을 다정하게 달래며, 침대에 누워 있는 송하린 바로 옆에서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라고 속삭였다. 그 순간, 송하린은 임하정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움켜쥔 주먹을 유리창에 갖다 댄 송하린은 차분하면서도 결연한 눈빛으로 창 밖을 바라봤다.
최서강 같은 남자는 쓰레기처럼 버릴 수 있다. 하지만 두 아이는 그녀의 전부였다. 그녀는 반드시 아이들을 되찾을 것이다!
그때, 이상한 낌새를 챈 최청환이 갑자기 창문 쪽을 올려다봤다.
순간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 마주쳤고 송하린은 본능적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최청환의 얼굴은 두려움에 일그러지더니 임하정의 품에 안겨 몸을 떨었다.
송하린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아이마저 그녀를 두려워하다니...
"아빠, 하정 엄마. 창문에 사람이 있어요!" 최청환은 작은 손으로 창문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아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본 최서강의 안색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곳은 바로 송하린의 병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문에는 어떤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청환아, 네가 잘못 본 게 아닐까?"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에요!" 최청환은 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머리가 엄청 긴 여자가 창문에 서 있는 걸 똑똑히 봤어요!"
미간을 찌푸린 최서강이 캐물으려 할 때,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송하린의 주치의 임이현이었다.
최서강은 빠르게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임 선생님."
"최서강 씨." 임이현의 목소리가 흥분에 잔뜩 들떠 있었다. "좋은 소식이에요. 사모님께서 드디어 깨어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