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씨 가문은 A시 전반에 걸쳐 수많은 산업을 소유한 거대한 가문이었다. 그들과 사돈을 맺는 일은 누구나 한 번쯤 꿈꿀 만큼 막강한 기회였다.
그런데 임씨 가문은 최씨 가문을 선택했다.
두 집안의 어르신은 과거 전우 사이였고, 최아린의 할아버지 최병호가 임태성 어르신의 목숨을 구해준 인연도 있었다. 그 인연을 계기로, 두 가문은 오래전부터 자식들을 약혼시키자는 약속을 나눴다. 이제 양가의 손주들이 모두 혼기에 접어든 만큼, 이 혼담을 성사시킬지 여부를 두고 임씨 가문이 먼저 입장을 밝히기 위해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최씨 가문의 사업은 눈에 띄게 기울고 있었다. 임씨 가문이 과연 약속을 지켜줄 거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터라, 이 제안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 거절할 수 있었겠는가?
최아린의 눈빛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지난 생에서, 그녀의 여동생 최유나는 한발 앞서 임씨 가문의 첫째 아들, 임연우를 선택했다.
임연우가 임씨 가문 상업 제국의 법적 상속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혼인만 하면 평생을 풍족하고 화려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임연우에게는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었다. 최씨 가문의 딸과의 결혼은 어디까지나 부모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 마지못해 받아들인 선택이었을 뿐이었다.
결혼 후, 임연우와 최유나는 거리를 두었고, 사람들 앞에서는 다정한 부부였지만, 뒤에서는 각자의 삶을 살았다.
늘 오만방자하던 최유나가 그런 현실을 어떻게 견뎠겠는가?
그녀는 임연우가 마음에 둔 여자를 여러 차례 몰래 해치려 했고, 결국에는 임연우마저 죽음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그리고 최유나 역시 좋은 끝을 보지 못하고, 난산으로 죽는 결말을 맞았다.
그 순간, 최아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침 임도준과 시선이 마주쳤다.
임도준은 잠시 움찔하는 듯하더니, 곧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온화하고 품위 있었으며, 미소는 은은했고, 요즘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고풍 콘셉트의 미남상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최아린은 소름이 끼쳐 온몸이 굳어졌다. 그 온화한 얼굴 아래에 어떤 짐승이 숨어 있는지, 그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전생의 기억이 물밀듯 밀려오자, 최아린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임도준의 시선을 피했다.
"자네도 마음이 있다면, 두 아가씨가 누구와 혼인할지 직접 결정하게 하는 건 어떤가?" 임태성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요즘 세상에 얼굴도 모른 채 결혼하는 일은 이미 유행이 지났지. 하지만 우리 같은 집안일수록 더 조심해야 하네. 남에게 속지 않도록 말이야. 특히 여자아이들은 더더욱. 세상엔 여자를 이용하려 드는 남자들이 적지 않으니까."
최아린의 아버지, 최준영이 맞장구치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최아린은 고개를 숙인 채, 왼손으로 오른손의 손바닥과 엄지 사이를 세게 꼬집었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정신을 또렷하게 붙들어 주었다.
이번 혼사를 최씨 가문이 거절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녀든 최유나든 누가 반대하더라도, 선택권은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 최유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임도준 씨를 선택하겠어요."
그때, 최아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번엔… 최유나의 선택이 왜 지난 생과 완전히 다른 거지?'
새어머니 임민서는 날 선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렴!"
임연우는 머지않아 임씨 가문의 거대한 상업 제국을 물려받을 사람이야. 반면 임도준은 연구에만 파묻혀 사는 한심한 책벌레일 뿐인데, 그런 사람을 따라가서 대체 무슨 득이 있겠어?
"저는 임도준 씨를 선택하겠어요." 최유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임도준을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임도준도 미소로 화답했고, 최아린 곁을 스쳐 지나가던 그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 듯하더니,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최준영은 최유나의 선택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평소 그녀를 유난히 아꼈던 탓에,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린아, 너는?" 그가 물었다.
최아린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손을 들어 임연우를 가리켰다.
임연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한 번 힐끗 보더니 곧 시선을 거두었다.
손을 내리는 순간, 최아린은 옆에서 장난기 어린 시선이 자신을 향해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최아린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뒤로 오간 대화가 정확히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내내 멍한 상태였다.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이 혹시 꿈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손바닥과 엄지 사이를 세게 꼬집을 때마다 전해지는 통증에, 그제야 조금씩 현실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본론을 마친 뒤 자리를 옮겨 최씨 저택 식당에서 식사를 끝내자, 임씨 가문 사람들은 곧바로 자리를 떴다.
임도준은 다정한 눈빛으로 몇몇 사람들에게 나직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반면 임연우는 최씨 가문 자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났다.
임도준의 시선이 사라지고 나서야, 최아린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최아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서재를 지나갈 때,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너 미쳤니? 임도준을 선택하다니? 임연우가 있는 한, 임도준은 평생 임씨 가문의 상속인이 될 수 없어." 임민서가 최유나를 꾸짖었다.
맞다. 최유나와 최아린은 이복자매였다.
최아린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아직 1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최준영은 임민서를 집으로 들였다. 그리고 함께 온 사람 중에는 최유나도 있었다.
분명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부터, 아버지는 이미 바람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수년 동안, 최아린은 자신의 집에서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엄마!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요!" 최유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연우는 이미 마음에 둔 여자가 있어요. 이번에 최씨 가문과 결혼하기로 한 것도 부모님 강요를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뿐이라고요. 그런 남자는 제가 아무리 애를 써도 저를 돌아봐 주지 않을 거예요."
임민서의 얼굴이 굳었다. "그래도 임도준과 결혼하면, 임씨 가문 미래 상속인의 아내 자리를 최아린한테 그냥 넘겨주는 거나 마찬가지잖니!"
"흥, 걔 따위가, 감히? 임연우 마음속에서는 그 어떤 여자도, 그가 마음에 둔 사람을 넘어설 수 없어요. 최아린이 시집을 간다 한들, 그 답답한 성격으로는 절대 임연우 눈에 들 리 없다고요. 하지만 임도준은 달라요. 세심하고, 온화하고, 다정하잖아요. 배우자에게도 유난히 충실하고요. 게다가 임씨 가문의 마지막 상속인이 누가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최아린은 고개를 숙이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는 방문에 기대어 손을 들어 올리며, 희고 흠 하나 없는 손목을 바라보았다.
지난 생과 달리, 그곳에는 짙은 흉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최유나는 임도준이 충실할 것이라 믿었지만, 그건 그녀의 착각이었다. 실제의 임도준은 수단이 잔인했고, 가스라이팅에 극도로 능숙한 사람이었다.
지난 생에서 그가 끝내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녀를 밟고 올라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만큼은, 최아린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는 같은 길을 걷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