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린이 임신을 했다.
병원을 나선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남편 강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우 씨..."
임신 진단서를 소중하게 손에 쥔 그녀의 손바닥은 어느새 땀으로 흥건했다.
"나... 할 말이 있어요."
전화기 너머에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내 냉기 서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나도 할 말이 있던 참이야. 7시까지 집에 들어갈게."
말을 마치고 그는 무심하게 통화를 끊었다.
"뚜뚜뚜..." 수화기 너머로 흘러 나오는 기계음에 시아린은 가슴이 살짝 조여 드는 것 같았다.
어째서인지 강신우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차갑게 느껴졌다.
시아린은 깊게 한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뺨을 톡톡 치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자.'
강신우는 A시 최대 글로벌 기업의 대표다.
강신우는 평소 회사일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그녀는 그의 차가운 태도가 자신을 향한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저녁 7시, 식탁 위에는 시아린이 정성껏 준비한 음식들로 가득했다. 그녀는 몇 분에 한 번씩 시간을 확인하며 강신우를 기다렸다.
낮에 통화 했을 때, 강신우의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걸 기억하고 있었던 그녀는 그가 즐겨 먹는 음식으로 저녁을 준비했다.
시아린의 예상과 달리, 평소 시간을 칼 같이 지키던 강신우가 많이 늦었다.
8시, 현관문이 열렸다.
강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냉기가 스며든 외투를 벗어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도우미에게 건넸다.
시아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그를 반겼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일이 좀 생겨서."
강신우는 서류를 손에 들고 식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은 그의 모습에선 우아한 기품이 흘렀다.
"할 말이 있다며?"
식탁 의자에 앉은 그는 젓가락을 들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말해 봐."
차갑게 내려 앉은 분위기에 시아린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임신했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 올랐지만,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녀가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우 씨도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먼저 해요."
강신우는 잠시 침묵하더니, 마침내 시아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정이가 돌아왔어."
짧은 한마디에 시아린은 피가 얼어 붙는 것 같았다.
그가 말한 우정은 바로 그녀의 사촌언니인 시우정이다.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강신우와 시우정 사이에는 남다른 감정이 존재했다.
원래 1년 전, 강신우와 결혼하기로 한 사람은 시우정이었다.
그러나 결혼식 전날 밤, 시우정은 아무 말 없이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두 가문의 체면이 걸린 문제였기에 시씨 가문은 어쩔 수 없이 시골에 살고 있던 시아린을 불러와 강제로 강신우와 결혼을 시켰다.
시아린은 강신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란 걸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시우정이 돌아 오면 자신은 즉시 강신우 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다만... 너무 갑작스러웠다.
시아린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안에 든 임신 진단서를 조용히 구겨버렸다.
"그래서..."
식탁 위에 놓인 서류를 바라보는 시아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거, 이혼 협의서에요?"
"아니."
강신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당분간 이혼할 생각은 없어."
마음이 놓이는 것도 잠시, 시아린은 이내 가슴이 철렁했다.
그는 당분간 이혼을 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 말은... 결국 언젠가는 이혼을 하겠다는 얘기와 다름이 없었다.
시아린은 코끝이 시큰해지며 가슴이 아파왔다.
"그럼 그 서류는 뭔가요...?"
"당시, 우정이는 자기가 불치병에 걸린 줄 알았대. 그래서 나한테 부담을 주지 않으려 결혼식 전에 홀연히 떠났다고 하더군. 그리고 우정이가 그러는데, 나와 지난 감정을 다시 시작하려는 건 아니라고 했어."
그러고 나서 그는 서류를 가져와 시아린에게 펼쳐 보였다.
"우정이는 네 도움이 필요해."
시아린은 잠시 멈칫하더니, 서류에 시선을 돌렸다.
그것은 골수 이식을 위한 HLA, 조직적합성 검사 결과였다.
그녀와 시우정의 골수가 유전적으로 일치하니 이식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몇 줄 안 되는 문구였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칼이 되어 심장에 꽂히는 것 같았다.
시아린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HLA검사를 받은 적이 없었다. 그때, 문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순간, 시아린은 심장이 조여 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슬픔에 잠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두 달 전... 비서를 보내 건강검진을 받게 한 게... 사실은 HLA 검사였던 거에요?"
강신우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미리 말하지 않은 건, 우정이가 돌아온 걸 비밀로 해야 했기 때문이었어."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시아린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 건강검진은 결혼 1년 만에 강신우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보인 관심이었다.
그때 시아린은 무척 기뻤다. 둘의 관계가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지금 돌이켜 보니 그때의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사실은 다른 여자를 위해 골수 기증자를 찾고 있었던 거였어...'
시아린은 고개를 들었다. 정성껏 차린 음식이 가득한 식탁 너머에 자리한 강신우를 바라보며 그녀가 단호히 말했다.
"싫어요."
거절과 동시에 그녀의 손이 아직은 평평한 아랫배로 향했다.
뱃속의 아이는 아직 2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 그녀는 차마 이 작은 생명에게 그런 고통을 견디게 할 수 없었다.
강신우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그녀가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최고의 의료진으로 준비할 테니 걱정하지 마. 수술 뒤에도 전문팀이 조리를 책임질 거니 건강에는 아무 영향이 없을 거야. 우정이의 병세는 심각한 상황이야.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그럼에도 시아린은 굽히지 않고 차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신우 씨, 나 임신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