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상대방은 잠시 침묵하더니, 곧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장난하냐? 너도 규율이 엄한 걸 잘 알고 있잖아. 일단 기밀 연구에 들어가면 끝날 때까지 외부랑 연락 다 끊어야 하고, 나가는 건 말도 안 돼. 심지어 프로젝트에 정식 등록되면 실종자로 처리돼. 기록도 다 말소돼서 완전히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야 해. 그렇게 되면... 네 가족은? 강민규는 어쩔 건데?"
고시아의 시선은 자연스레 벽에 걸린 결혼사진으로 향했다.
결혼 사진 속 두 사람은 마치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듯한 눈빛을 나누고 있었다.
귓가에는 여전히 강민규가 속삭이던 맹세가 또렷하게 맴돌았고, 그와 함께했던 달콤했던 순간들은 이제 쓴물처럼 그녀의 가슴을 적셨다.
"이미 결정 내렸어요. 내일 서류 작성하러 갈게요."
그렇게 말한 후, 고시아는 곧장 전화를 끊었고 상대방에게 계속 설득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바로 그때, 아래층에서 차량 브레이크 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강민규의 훤칠한 실루엣이 현관에 나타났다. 그는 뼈마디가 선명한 큰 손으로 검은 넥타이를 풀어헤치며 곧장 욕실로 향했다.
옷걸이에 걸린 그의 외투에선 VRA의 최신 향수 FIRE2의 짙은 향이 풍겨 나왔다. 불 같이 열정적이고 화끈한 그 향은 고시아의 담담함과는 정반대의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간단히 샤워를 마친 강민규는 회색 목욕가운을 두른 채 욕실에서 나왔다.
헐렁하게 묶인 허리끈 사이로 드러난 탄탄한 가슴과 복근, 촉촉한 머리카락에 어린 물기가 얼굴선을 따라 흘러내리며 그의 눈빛을 더 차갑고 짙게 만들었다.
강씨 가문의 장남이자 금융계의 금수저인 강민규는 말 그대로 외모든 재력이든,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남자였다.
한때 그에게 그렇게 설레던 그녀는, 지금은 그만큼이나 깊은 혐오로 마음속에 가득 차 있었다.
"왜 멍하니 있어? 내 얼굴에 다시 한번 반한 거야?" 강민규는 느긋하게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낮고 섹시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보고 싶었어?"
말하는 동시에 강민규의 손은 그녀의 허리 라인을 따라 아래로 미끄러졌고, 닿은 피부가 본능적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키자, 고시아는 곧바로 몸을 살짝 피했다.
그러자 강민규의 손은 그대로 허공에 멈추었고,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왜 그래? 화났어?"
고시아는 감정을 다잡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아무 의미도 없는 말다툼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가슴 속의 고통을 억누르며 침대 옆의 서랍에서 비밀번호가 걸린 박스를 꺼내 강민규에게 건넸다. "이거, 선물이야."
그 안에는 그녀의 서명이 적힌 이혼서류가 들어 있었고, 이것은 그녀가 강민규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비밀번호를 맞혀야 열 수 있어."
강민규는 박스를 힐끗 보고는, 고사아가 여전히 장난치는 줄로만 생각했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박스를 탁자 위에 툭 내려놓고는 그녀를 다시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턱을 올리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한테는 네가 제일 큰 선물이야."
고시아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몸을 피했고, 강민규는 잠시 멈칫하더니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일 때문에 바빠서 기념일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는데, 화 많이 났지?"
강민규는 그녀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춘 뒤, 옷걸이에 걸린 외투 속에서 네모난 상자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마음에 들어?"
상자 속엔 정교하게 세공된 고풍스러운 금실옥 비녀가 들어 있었다.
"특별히 널 위해 낙찰 받은 거야. 너 이런 거 제일 좋아하잖아. 한번 해봐."
남자의 목소리엔 억눌린 애정과 은근한 단호함이 섞여 있었다.
한때, 고시아는 그 말투에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다.
운성 사람이라면 강민규가 아내를 목숨처럼 아낀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고시아도 그때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휴대폰 속의 그 사진들만 없었다면, 그녀는 정말로 이 선물에 감동했을지도 모른다.
사진 속, 스무 살 초반으로 보이는 혼혈의 여자는 요염한 눈빛으로 고개를 젖히고 있었고, 풍성한 웨이브 머리는 강민규가 조금 전 고시아에게 건넨 비녀와 같은 것으로 느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늘고 예쁜 목덜미엔 선명한 키스 자국이 남아 있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건데, 마음에 안 들어?" 강민규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넘겨주었고, 손끝이 그녀의 피부를 살며시 스치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고시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눈 앞의 비녀를 그의 가슴에 꽂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평소와 전혀 다른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정말 세상에 단 하나뿐인 거 맞아?"
강민규는 순간적으로 가슴이 움찔했고 눈앞의 이 여자가 어딘가 평소랑 다르게 느껴졌다. 그의 눈빛이 점점 깊어질 무렵, 고시아는 다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정말 단 하나뿐인 거라면, 마음에 들 수밖에 없지." 그녀는 손을 들어 상자 뚜껑을 닫았다. "난 아직 마무리 못한 업무가 있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너 먼저 자."
그렇게 말한 뒤, 고시아는 상자를 꼭 쥐고 강민규의 품에서 빠져 나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살짝 헤쳐진 목욕가운 사이로 은은한 냉기가 스며들어왔고, 강민규는 왠지 모르게 가슴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오늘의 고시아는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그는 탁자 위에 놓인 비밀번호 상자를 다시 한번 바라보고는 이내 마음을 놓았다.
고시아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강민규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여자는 절대 자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때, 목욕가운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연이어 진동했다.
휴대폰을 꺼내 내용을 확인한 강민규는 화면에 띄운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메시지에 목이 화끈하게 타올랐다.
침대에 앉아 몇 마디 답장을 보내던 강민규는 곧 메시지를 말끔히 삭제했다. 그리고 나서야 휴대폰을 탁자에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익숙한 향기가 은은하게 그의 신경을 어루만졌고, 강민규는 금세 깊은 잠에 빠졌다.
한편, 서재에서는 고시아가 그 비녀의 사진을 찍어 명품 리세일 샵에 전송하고 있었다. "이 물건, 최대한 빨리 처분해주세요."
그리고는 계좌번호도 함께 보냈다. "여기로 입금해 주시고요."
그 계좌는 연구소의 공용 계좌였다.
'이런 더러운 물건도 이 정도면 쓸모를 다한 거지.'
다음 날 아침.
강민규가 눈을 떴을 때, 고시아는 이미 외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는 팔을 짚고 상체를 일으킨 뒤 그녀를 향해 손짓을 했다.
막 깨어난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며, 은근한 유혹이 깃들어 있었다. "이리 와, 한 번만 안아줘."
고시아는 셔츠 단추를 잠그던 손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 담담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연구소에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나가봐야 해. 아침은 못 챙겼으니까, 너 혼자 알아서 해결해."
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가방을 들고 몸을 돌려 떠났는데 어제 밤과 같이 눈길도 주지 않았다.
강민규의 손은 그대로 허공에 멈췄고, 가슴에 뻥 뚫린 듯한 공허함이 밀려오며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평소라면, 고시아는 아무리 바빠도 꼭 강민규에게 아침을 챙겨주었고, 딱 먹기 좋을 온도에 그를 깨워주었으며 작고 하얀 얼굴로 애교를 부리며 따뜻한 포옹과 아침 키스를 요구하던 그녀는 꼭 새침하고 나른한 고양이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시아야."
문을 열려던 순간, 강민규의 목소리가 그녀의 등 뒤에서 들려왔고, 고시아는 문득 심장이 거칠게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에 숨이 턱 멎을 것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는데 눈빛은 어느새 평온을 되찾고 있었다. "왜?"
강민규는 고시아를 몇 초간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이상함도 감지하지 못하자 자신이 예민했던 거라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아무리 바빠도 밥은 꼭 챙겨 먹고 밤샘은 되도록 하지 마. 마리나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서 나도 며칠간은 바쁠 것 같아. 그러니까 밤 늦게까지 날 기다리지 않아도 돼."
"알았어." 고시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따스한 아침 햇살에 비친 그녀의 미소는 마치 첫 만남의 그 순간을 방불케 하듯 다시 강민규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정만 끝나면, 강심도로 여행 가자. 우리 신혼여행도 못 갔잖아."
고시아는 마음속의 상처가 더 벌어지는 것 같았고, 핏물이 흐를 정도로 심장이 조여왔다.
몇 년 전, 그들이 결혼을 준비할 때 그녀는 수십 개의 여행 일정을 계획했고, 앞으로의 인생에서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그 중의 한 곳을 선택해 여행을 즐기기로 하며 평생의 사랑과 변치 않을 마음을 약속했다.
하지만 불과 며칠 전, 강민규는 다른 여자를 데리고 강심도로 갔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침대에서 사랑을 나눈 은밀한 사진이 아직도 그녀의 휴대폰에 남아 있다.
고시아는 시선을 내리며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 일정만 끝나면..."
그 말만 남기고, 그녀는 곧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고시아의 눈에는 더 이상 온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강민규, 안타깝지만, 이번엔 그런 기회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