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인생 전부를 만들어줬는데, 그 남자는 다른 여자를 지키기 위해 나를 해고하고 있었다.
내 세상이 산산조각 나던 바로 그 순간, 엘리베이터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우리 회사 CTO님이 내리셨다. 그의 시선이 눈물로 얼룩진 내 얼굴과 분노로 이글거리는 태준의 얼굴을 차례로 훑었다.
그는 내 남자친구를 똑바로 쳐다보며, 살벌하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이 회사 오너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가?”
제1화
이서아 POV:
2년이라는 시간, 서울과 부산 사이의 500킬로미터라는 거리는 비행기 티켓이 아니라, 내 휴대폰 속 15초짜리 영상 하나로 무너져 내렸다.
사무실은 죽은 듯이 고요했다. 새벽 두 시에만 존재하는 숨 막히는 정적. 들리는 소리라고는 컴퓨터의 낮은 팬 소음과 갈비뼈를 미친 듯이 두드리는 내 심장 소리뿐이었다. 나는 거대한 데이터 패키지가 컴파일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짧게는 5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까지 걸리는 작업이었다. 시간을 죽이기 위해, 나는 늘 하던 대로 휴대폰을 들었다.
친구들의 아기 사진과 동남아 휴가 사진들을 무심하게 넘기던 내 엄지손가락이 한 영상 앞에서 멈췄다. 모르는 여자였다. 생기 넘치고 활기찬 얼굴로 카메라를 보며 웃고 있었다. 주근깨가 흩뿌려진 코와 아무렇게나 묶은 검은 포니테일이 매력적인, 생동감 넘치는 여자였다. 그녀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 운전자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운전자는 등을 보이고 있었지만, 나는 저 가죽 재킷을 알았다. 우리의 3주년 기념일에 내가 사준 것이었다.
여자가 몸을 앞으로 숙여 운전자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엔진 소리를 뚫고 소리쳤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얼굴 위로 휘날렸지만, 목소리는 놀랍도록 선명했다. “정상까지 시합이야, 강태준! 지는 사람이 떡볶이 쏘기!”
영상 아래 캡션에는 암벽 등반, 떡볶이, 윙크하는 얼굴 이모티콘이 나란히 있었고, #클라이밍파트너 라는 해시태그가 달려 있었다.
강태준.
숨이 턱 막혔다. 온 세상이 내 손안의 작고 빛나는 화면으로 좁혀졌다. 그가 아주 잠깐 고개를 돌렸을 때, 가로등 불빛이 그의 날카로운 턱선을 비췄다.
태준이었다.
손가락이 마비된 듯 뻣뻣했다. 나는 그의 연락처를 눌렀다. 신호가 한 번, 두 번, 세 번 울리고 나서야 그가 전화를 받았다.
“어, 자기야. 무슨 일이야? 늦었는데.” 그의 목소리는 웅얼거리듯 멀게 들렸다.
그의 뒤로 시끄러운 음악, 사람들의 고함 소리, 유리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파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어디야?” 삭막하고 조용한 내 사무실 안에서 내 목소리는 공허하게 울렸다.
“아, 그냥 헬스장 사람들이랑 잠깐 나왔어.” 그는 너무 빨리 대답했다. “큰 프로젝트 하나 끝내서, 축하 좀 하고 있어.”
한 여자의 웃음소리가, 날카롭고 익숙한 그 웃음소리가 그의 휴대폰 가까이에서 울려 퍼졌다. 영상 속의 그 웃음소리였다.
“태준아,” 나는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누구랑 있어?”
“그냥 팀원들이야, 서아야. 걱정 마. 곧 집에 들어갈게.” 그의 말은 나를 안심시키려는 의도였겠지만, 내 예민해진 신경을 사포로 긁는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집으로 운전해 가는 동안의 기억은 흐릿했다. 지정된 주차 공간에 차를 세우고, 식어가는 엔진의 째깍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 영상을 다시 봤다. 그리고 또 봤다. 또다시.
재킷은 분명히 그의 것이었다. 핸들 바에 걸린 헬멧은 내가 꼭 사야 한다고 고집했던 것이었다. 나는 댓글 창으로 화면을 넘겼다.
‘ClimbLife’라는 아이디의 사용자가 “두 분 너무 잘 어울려요!”라고 써놓았다.
영상 속 여자, 프로필 이름이 최유라(Kyra Boyd)인 그녀는 웃는 이모티콘 여러 개로 답글을 달았다. “최고의 클라이밍 파트너예요! 제가 더 잘하게 만들어주죠!”
나는 그녀의 프로필을 클릭했다. 전체 공개였다.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오르는 그녀의 사진들이 연달아 나왔다. 군살 없이 탄탄한 몸이었다. 그리고 그중 적어도 열두 장의 사진에는 태준이 있었다. 절벽 아래에서 그녀 옆에 서 있거나,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과 함께 웃고 있거나, 단체 사진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었다.
그는 클라이밍을 좋아했었다. 대학 시절, 내 커리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그의 야망이 2년 전 그를 부산으로 보내기 전까지는 함께 다녔었다. 그는 이사 간 후로는 너무 바빠서 갈 시간이 없다고 했다. 주말 대부분을 일하며 보낸다고 내게 말했었다.
그는 새로운 도시에 있는 거다,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새로운 친구를 사귈 수도 있지. 그건 건강한 거야. 하지만 그의 삶, 그의 진짜 삶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모호한 안심과 점점 더 멀게만 느껴지는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채워진 2년의 공백.
그거였다. 2년간의 심야 통화와 함께하지 못한 기념일들 위로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던 내 인내의 끈이, 마침내 끊어졌다. 다음 달로 꼼꼼하게 계획해 두었던 전근, 18시간씩 일하며 얻어낸 그 발령은 다음 달이 아니었다. 바로 지금이었다.
24시간 후, 나는 부산에 있는 옴니테크 타워의 반짝이는 로비에 서 있었다. 내 옆에는 기내용 캐리어가 나의 충동적인 비행을 말없이 증명하며 서 있었다.
“이서아 님!” 리셉션 직원이 활짝 웃으며 나를 맞았다. “민준혁 CTO님께서 곧 발령받아 내려오실 거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오늘 오실 줄은 몰랐어요! 정말 영광입니다. ‘아우라’ 프레임워크는 전설적이잖아요. 강태준 팀장님이 드디어 오셨다고 정말 기뻐하시겠어요.”
나는 입꼬리만 살짝 올려 웃었다. 태준은 내가 오는 걸 몰랐다. “팀장님 사무실에 계신가요?”
“네. 방금 새로운 비서분이랑 올라가셨어요. 바로 임원층으로 연결해 드릴게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시간은 영원처럼 느껴졌다. 광택 나는 강철 벽에는 뒤틀린 내 모습이 비쳤다. 500킬로미터의 거리를 잇는 다리를 놓기 위해 잠과 주말, 남자친구와의 시간을 희생한 여자의 모습. 나는 우리가 함께 꾼 꿈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를 위한 코너 오피스, 우리를 위한 함께하는 삶. 나는 그의 성공을 뒤에서 조종한 설계자였고, 우리 회사 전체의 기반인 ‘아우라’ 소프트웨어 프레임워크의 익명 개발자였다. 그는 내가 그저 실력 좋은 소프트웨어 설계자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기계 속의 유령, 그를 부산 프로젝트 팀장으로 조용히 추천하고, 우리 CTO인 민준혁 님에게 그가 적임자라고 설득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마침내 그의 뒤가 아닌, 그의 옆에 서기 위해 이곳에 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부드러운 차임벨 소리와 함께 열렸다.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태준의 사무실 밖에 태블릿을 들고 서 있는, 영상 속의 그 여자. 최유라.
리셉션 직원의 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의 새로운 비서.
그녀는 고개를 들었고, 내 캐리어를 보자 미소가 순간적으로 굳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내 구두굽이 대리석 바닥에 또각거렸다. “안녕하세요,” 나는 생각보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이서아입니다. 본사에서 전근 온 신임 소프트웨어 설계자예요.”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았다. 악력은 단단했고, 그녀의 눈은 내 얼굴과 굳게 닫힌 태준의 사무실 문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최유라입니다. 강태준 팀장님 프로젝트 신입 비서예요.”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방식—너무나 익숙하고, 너무나 편안한—에 속이 뒤틀렸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건 단순한 우정 이상이라는 것을. 그녀의 얼굴은 영상에서처럼 생기 넘치고 웃음기 가득했지만, 가까이서 본 그녀의 눈에는 소유욕 같은 것이 번뜩였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즉시 알아차렸다. “영상 봤어요,”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오토바이 탔던 거요.”
그녀의 친절한 태도는 사라지고, 나를 차갑게 뜯어보는 시선으로 바뀌었다.
“서아야?”
태준의 목소리가 내 등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는 사무실 문가에 서류철을 든 채 서 있었다. 비행 내내 붙잡고 있던 희망, 이 모든 것이 오해일 거라는 필사적인 믿음이 증발해버렸다.
그의 눈, 내가 5년 동안 사랑했던 그 따뜻한 갈색 눈동자가 커져 있었다. 하지만 기쁨 때문이 아니었다. 사랑 때문도 아니었다.
오직 순수하고, 완전한 경악만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