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연, 지금 당장 무릎 꿇고 세미에게 사과해!"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넓은 거실을 가로지르며 울려 퍼졌다.
임나연은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주머니 안에 숨겨둔 작은 녹음기를 꼭 쥐었고, 시선은 천천히 소파에 앉은 그녀의 셋째 오빠, 임호건에게 향했다.
그의 곁에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임씨 가문의 양녀, 임세미가 천진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임나연의 친 오빠가 그녀더러 양녀인 임세미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라며 다그치고 있다.
"네가 일부러 세미를 계단에서 밀었잖아.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어? 역겹다, 정말! 너 같은 사람이 내 동생이라니…" 임호건이 말했다.
'역겹다'라는 말이 그녀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 팠다.
임나연은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며 가슴을 짓누르는 숨 막히는 아픔을 억누르며 대답했다. "난 그런 적 없어..."
하지만 임나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임호건은 테이블에서 유리컵을 집어 들어 그녀를 향해 세게 던졌다. "아직도 변명할거야?!"
유리컵이 그녀의 발등에 부딪힌 후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며 깨졌다.
임나연의 가늘고 흰 발등은 금세 붉게 부어 올랐고, 날카로운 파편이 그녀의 다리를 그어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러나 임나연은 움찔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조용히 서 있었다.
임호건이 그녀에게 이렇게 소리를 지르거나, 그녀를 다치게 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오빠, 제발... 언니에게 너무 심하게 하지 마." 옆에 있던 임세미가 다급히 말렸다. "언니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이 일은 정말 언니 잘못이 아니니, 언니를 탓하지 마. 그냥 단순한 사고였어."
그 순간, 임호건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세미야, 너는 왜 아직도 저년을 감싸는 거야? 바보 같은 동생아, 너도 생각해 봐. 여자애가 몸에 흉터라도 남으면 얼마나 보기 흉하겠어!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야!"
"하지만… 오빠…"
"그만해, 세미야. 더 이상 저년을 위해 사정하지 마! 이리 와봐, 어디 다쳤는지 보게."
"나 괜찮아, 오빠. 별거 아니야…"
그들의 다정한 모습에 임나연은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임세미가 다친 건 안쓰러워하면서, 내가 피를 흘리며 서 있는 건 아무렇지 않은가? 나도 여자애인데, 그는 자신의 친동생이 다쳤는데도 걱정되지 않는 걸까?'
어린 시절부터 고아원에서 자란 임나연은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었고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왔다.
그 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녀를 입양하여 따뜻하게 키워주었다. 그들의 보살핌 속에서 임나연은 한 번도 학대당한 적이 없었고, 자신이 부담스러운 존재라고 느껴본 적도 없었다.
임호건은 임세미의 상처를 돌본 뒤, 다시 임나연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얇은 조롱의 미소가 떠오른 것을 보고 임호건의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뭐가 웃겨? 임나연, 2년 전에 우리가 너를 집으로 데려왔을 때 분명히 말했잖아. 피가 섞이지 않았더라도 세미를 친동생처럼 대해야 한다고. 세미는 이 집에서 자랐고 너는 언니로서 세미를 보호하고 아껴야 해. 그런데 지난 2년 동안 너는 어떻게 했어?"
임나연은 그의 말에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임호건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진짜 가족으로 대해준 적 없었다.
2년 전, 임씨 가문이 임나연을 찾으러 왔을 때, 그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자신이 다시 가족을 찾았다고 생각하며, 이제 혼자 살아갈 필요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녀는 할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박학선 어르신의 초대를 거절하고 임씨 가문과 함께 살기로 결심했다.
지난 2년 동안, 그녀는 늘 조심했고, 언제나 양보했다.
항상 가장 좋은 건 임세미의 것이었고, 임나연은 늘 뒤에서 그녀가 버린 것만 주워야 했다.
그렇게 계속 인내하고 기다리면 가족들이 그녀를 받아들이고, 그녀도 그들의 일원으로서 자리 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임세미에 대한 끝없는 칭찬과 그녀에 대한 끊임없는 질책뿐이었다. 모든 실수는 항상 그녀의 탓이었다.
어느 날, 임나연은 그들의 악독하고 혐오스러운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 때 임나연이 밖에서 죽었으면, 우리 가족은 짐을 덜었을 텐데."
그 말을 들었을 때, 임나연의 숨이 멎었다. 심장이 쥐어짜듯 아파왔고, 손끝은 싸늘하게 식었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다들 나를 그토록 미워하고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했을까? 그럴 거면 2년 전, 나를 왜 데려온 거야?'
임나연은 눈을 감았고, 마음은 죽은 연못처럼 가라앉았다. 그 안엔 더 이상 감정이 없었다.
그 순간 그녀는 더는 참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더 이상 이 가족을 원하지 않고, 자신을 짐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쫓고 싶지 않았다.
임호건이 다시 그녀를 바라봤을 때, 임나연의 얼굴에는 묘한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더 이상 고통도, 원망도, 슬픔도 없었고 오직 차분함만이 남아 있었다. 그 차분함은 임호건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손을 치켜들며 으름장을 놓았다. "세미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지 않으면, 나한테 혼날 줄 알아!"
그러나 임호건이 손을 내리치기도 전에, 한 손이 단단히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바로 임나연이었다.
그녀가 그를 막았다!
"임나연, 너!" 임호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2년 동안 한 번도 반항한 적 없던 아이가 지금 그의 손을 막은 것이다.
임호건의 얼굴에 충격이 드러난 것을 보고 임나연의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난 임세미를 밀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했어."
임호건은 믿지 못하며 말했다. "아직도 변명할 셈이야? 넌 혼나야 해!"
"임호건." 임나연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무죄라는 증거를 보여주면, 너와 임세미, 내게 무릎 꿇고 사과할 수 있겠어?"
"뭐라고?" 임호건은 자신이 헛들은 줄 알았고, 곧 분노가 폭발했다. "내가 너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너 진짜 미친 거 아니야?"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고, 이런 동생이 있다는 사실이 그저 치욕스러웠다.
임세미는 소파에 앉아 이 모든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임호건이 임나연을 응징하는 걸 기다리고 있었지만, 임나연의 말을 들은 순간 그녀의 눈빛에 의구심이 스쳤다.
'증거? 임나연이 뭔가를 가지고 있는 걸까?'
하지만 곧 임세미는 놀란 기색을 감추고 순한 미소로 다가왔다. "오빠, 그만해. 언니와 더 이상 싸우지 마."
"세미야, 이년 감싸지 말라고 했지?!" 임호건이 소리쳤고 목소리는 천둥처럼 울렸다. "무슨 증거인지, 당장 꺼내 봐!"
임나연은 전혀 움찔하지 않고, 주머니에서 작은 물건을 꺼냈다.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순간, 임세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건… 녹음기? 설마…! 임나연은 어떻게 녹음기를 숨기고 있었던 거지?!'
임나연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기계음이 짧게 울린 뒤, 곧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니, 이 자리 어때?"
임호건은 바로 그것이 임세미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 다음,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임세미, 너 왜 계단에 서 있어?"
그건 분명 임나연의 목소리였다.
다음 순간, 임세미의 날카롭고 소름 끼치는 말투가 들려왔다. "내가 호건 오빠에게 언니가 나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말하면, 언니는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