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남편이 윤희수와 함께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나를 차갑게 훑어보더니, 아이들에게 ‘진짜 엄마’와 아이스크림을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희수 아줌마가 우리 진짜 엄마였으면 좋겠어.”
떠나는 딸아이의 목소리가 집 안에 울려 퍼졌다.
내 피가 흥건한 웅덩이 속에 홀로 버려진 채, 나는 마침내 모든 것을 깨달았다. 내가 이 가족에게 쏟아부은 6년간의 사랑은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래. 좋다.
소원대로 해 주지.
제1화
은행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발끝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내 마음은 따뜻한 온기로 가득했다. 바로 오늘이었다. 여섯 번째 생일을 맞은 내 쌍둥이, 시우와 시아를 위해 신탁 펀드를 만들어주는 날.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주고 싶은 엄마의 깜짝 선물이었다.
나는 서류를 자산 관리 담당인 김 부장에게 건넸다. 그는 친절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서류는 다 준비된 것 같네요, 사모님.”
나도 진심으로 행복하게 미소 지었다.
“그냥 아진이라고 불러주세요.”
지난 6년간 나는 IT 거물 권도준의 아내, ‘사모님’으로 불렸다. 아직도 꿈만 같았다.
그가 키보드를 두드리자, 그의 미소가 살짝 옅어졌다.
“본인 확인 절차만 간단히 진행하겠습니다, 서아진 고객님.”
몇 번의 클릭이 더 이어지고, 그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모니터와 나를 번갈아 쳐다봤다.
“죄송합니다만,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요? 혹시 이체 한도를 초과했나요?”
나는 현실적인 문제들을 떠올리며 물었다.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
그는 망설이며 말했다.
“시스템에서 신탁 계좌 개설 신청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내 미소가 무너져 내렸다.
“왜죠? 제 정보에 오류라도 있나요?”
그는 헛기침을 하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저희 기록에 따르면, 권시우, 권시아 군의 법적 친모는 서아진 고객님이 아니십니다.”
숨이 멎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네? 그럴 리가요. 제가 엄마예요. 제가 낳았다고요.”
김 부장은 내 눈을 피하며 모니터를 내 쪽으로 살짝 돌렸다.
“시스템상 두 자녀의 법적 친모는… 윤희수 씨로 되어 있습니다.”
윤희수.
그 이름이 갑자기 텅 비어버린 내 머릿속을 세차게 울렸다. 권도준의 첫사랑. 그가 늘 슬프고 아련한 눈빛으로 이야기하던 여자. 몇 년 전 그를 떠났다는 바로 그 여자.
손에 감각이 없었다.
“뭔가 착오가 있을 거예요. 아주 끔찍한 착오요.”
“죄송합니다, 고객님.”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출생 증명서는 전산으로 연동되어 있어서요. 이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나는 그를 멍하니 바라봤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지난 6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갔다. 잠 못 이루던 밤들, 아이들의 첫걸음, 까진 무릎, 잠자리에서 읽어주던 동화책들. 내 삶의 전부. 내 세상.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나는 의자가 끌리는 거친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남편과 이야기해봐야겠어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은행을 나섰다. 도시의 소음이 귓가에 멍하게 울렸다. 머릿속은 그 불가능한 사실 하나만을 제외하고는 새하얗게 지워져 버렸다.
권도준을 만나야 했다. 그가 설명해 줄 것이다. 이건 분명 행정 착오이거나, 잔인하고 끔찍한 장난일 뿐이다.
나는 손을 떨며 운전대를 잡고 그의 강남 사무실로 향했다. 내가 늘 자랑스러워했던, 유리와 강철로 빛나는 그 빌딩이 이제는 감옥처럼 보였다.
그의 비서가 나를 보고 놀라 일어섰다.
“사모님! 대표님은 지금 회의 중이신데…”
나는 그녀를 지나쳐 걸었다. 값비싼 카펫이 깔린 고요한 복도에 내 발소리만 울렸다. 그의 사무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권도준의 목소리, 그리고 한 여자의 목소리. 권도준이 간직한 녹음 파일에서나 들어봤던 부드럽고 아름다운 목소리.
윤희수.
나는 문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손이 허공에서 굳어버렸다.
“그 여자, 아직도 모르지?”
윤희수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응.”
권도준이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애들이 자기 자식인 줄 알아. 엄마 노릇은 잘하더군. 순진해 빠져서 그렇지, 꽤 헌신적이야.”
차가운 공포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좋은 대리모였다는 뜻이겠지.”
윤희수가 웃었다.
“지난 6년간 공짜 보모 노릇까지 해줬잖아. 솔직히, 권도준, 당신 계획은 완벽했어. 나랑 적당히 닮았으면서, 가짜 결혼에 동의할 만큼 절박한 여자를 찾아내다니.”
숨이 턱 막혔다. 가짜 결혼. 대리모.
“어쩔 수 없었어.”
권도준이 말했다.
“난 내 아이들이 필요했어. 우리 아이들. 애들은 당신 눈을 닮았어, 희수야. 당신 재능까지도. 서아진의 유전자는… 실망스러웠을 거야. 이 방법 덕분에 완벽한 아이들이 태어났지.”
진실이 무너져 내렸다. 물리적인 무게감에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시험관 시술. 내 난자와 그의 정자를 쓴다고 했던 의사들의 말. 전부 거짓이었다. 윤희수의 난자였다. 나는 그저 자궁, 인큐베이터, 도구에 불과했다.
“속이기도 쉬웠어.”
권도준이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무심한 잔인함이 가장 끔찍했다.
“원래 좀 단순한 여자야. 내가 자길 사랑하는 줄 알지. 당신이 돌아올 때까지 쓸 만한 대용품이었을 뿐인데.”
시야가 흐려졌다. 세상이 빙빙 돌았다. 나는 쓰러지지 않으려고 벽을 붙잡았다.
장면이 바뀌고, 내 마음은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나는 가족의 빚 때문에 팔려가듯 해야 했던 결혼식에서 도망치고 있었다. 값싼 드레스 자락은 찢어져 있었다. 겁에 질려 숨어든 호텔에서, 나는 엉뚱한 스위트룸으로 잘못 들어갔다.
권도준이 그곳에 있었다. 그는 도시의 야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몇 년간 짝사랑해온 남자, 다른 세상의 사람이었다. 그는 내 남루한 모습을 보고 동정이 아닌, 계산적인 눈빛으로 나를 훑어봤다.
“아내가 필요해.”
그가 차분하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대용품일 뿐이지만. 내 아이를 낳아줄 사람. 당신, 그녀와 닮았군. 꿈에도 못 꿀 인생을 살게 해주지.”
그때 그의 책상 위 사진을 봤다. 나와 같은 머리색, 비슷한 얼굴 골격을 가진 여자. 윤희수.
오랜 짝사랑과 탈출에 대한 갈망에 눈이 멀어, 나는 동의했다. 나는 그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헌신이면 충분할 거라고 믿었다.
그는 내게 성대한 결혼식, 아름다운 집, 그리고 두 아이를 주었다. 그는 친절했고, 세심했으며, 관대했다. 그는 내 육아 방식을 칭찬했다. 밤에는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진짜라고 믿어버렸다. 나는 내 모든 사랑을 이 가족, 이 삶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환상. 아이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우리 사랑의 결실이어서가 아니라, 다른 여자에 대한 그의 집착의 산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억이 희미해지고, 나는 차갑고 삭막한 복도에 남겨졌다. 진실은 가슴에 뻥 뚫린 상처가 되었다.
나는 돌아서서 도망쳤다. 건물 밖으로 뛰쳐나가자, 내면의 폭풍처럼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비에 흠뻑 젖었지만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텅 비고 저릿한 고통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인도에 서 있었다. 비가 머리카락을 얼굴에 달라붙게 했고, 눈물은 뺨을 타고 흐르는 빗물과 섞였다. 전화가 울렸다. 집사였다.
“사모님, 학교에서 방금 전화 왔습니다. 비가 많이 오는데, 기사님 보내서 아이들 데려올까요?”
아이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본능적인 사랑의 불꽃이 일었다.
“네.”
나는 목이 메어 말했다.
“네,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와 주세요.”
전화를 끊고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도 없었다. 결국, 내 몸은 나를 집으로 이끌었다. 집은 따뜻하고 아늑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거짓이었다.
나는 물을 뚝뚝 흘리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시우와 시아가 계단 꼭대기에서 밝은 얼굴로 서 있었다.
“엄마!”
시아가 외쳤다.
그러다 아이의 시선이 내게, 흠뻑 젖은 내 비참한 모습에 닿았다. 미소가 사라지고, 경멸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꼴이 끔찍하네.”
“희수 아줌마는 절대 저런 모습이 아닐 텐데.”
시우가 팔짱을 끼며 덧붙였다.
이미 산산조각 난 내 심장이 더 작고 날카로운 파편으로 부서졌다.
“거기 서서 카펫에 물 흘리지 마.”
시아가 날카롭게 말했다.
“더럽잖아.”
아이는 한 걸음 다가와 나를 밀었다. 세게 민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지쳐 균형을 잃은 상태였다. 나는 뒤로 넘어졌고, 머리가 계단 아래의 단단한 기둥에 부딪히며 끔찍한 소리가 났다.
눈앞에서 통증이 폭발했다. 나는 기절한 채 그들을 올려다봤다. 아이들은 놀라지도, 달려와 도와주지도 않았다.
그들은 웃었다.
“저것 좀 봐.”
시우가 비웃었다.
“진짜 칠칠맞아.”
바로 그때, 권도준이 윤희수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나를,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피가 흐르는 나를 봤다.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다 뭐야?”
그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가 넘어졌어요.”
시아가 밝게 말했다.
“이제 희수 아줌마랑 가도 돼요? 아이스크림 사주기로 약속했잖아요.”
권도준의 시선이 차갑고 무심하게 나를 스쳐 지나간 뒤, 아이들에게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지. 가서 외투 입어.”
그는 다시는 내 쪽을 쳐다보지 않고 윤희수의 외투를 벗는 것을 도왔다. 아이들은 신나게 재잘거리며 내 옆을 지나쳐 달려갔다.
“난 저 아줌마보다 희수 아줌마가 훨씬 좋아.”
시아가 내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오빠에게 말했다.
“저 아줌마가 우리 진짜 엄마였으면 좋겠어.”
“원래 진짜 엄마거든, 멍청아.”
시우가 속삭였다.
“아빠가 말해줬어.”
그들이 떠났다. 현관문이 닫히고, 나는 빗물과 내 피가 흥건한 웅덩이 속에, 조용하고 텅 빈 집에 홀로 남겨졌다.
느리고 씁쓸한 웃음이 가슴속에서 터져 나왔다. 이상하고 부서진 소리였다.
그들은 윤희수가 엄마이길 바랐다.
그래. 좋다.
소원대로 해 주지.
나는 끝났다. 거짓말도, 고통도, 이 모든 것들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