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레지던트 수련을 마치고 수석 레지던트로 출근한 첫날, 남편의 비밀이 내 삶으로 걸어 들어왔다. 남편의 눈을 꼭 닮은 네 살배기 아이, 그리고 내가 너무나도 잘 아는 희귀 유전성 알레르기를 가진 채로.
내가 결혼한 남자, 강태준. 나 없이는 살 수 없다 맹세했던 나의 찬란한 라이벌이었던 그에게, 또 다른 가족이 있었다.
그의 회사 창립 기념 파티에서, 그의 아들은 하객들 앞에서 나를 아빠를 뺏으려는 나쁜 여자라고 소리쳤다. 내가 아이에게 다가가려 한 걸음 떼었을 때, 태준은 아이를 감싸 안으며 나를 바닥으로 거칠게 밀쳐냈다. 나는 머리를 부딪혔고, 뱃속의 아이와 함께 내 삶도 핏물과 함께 흘러내렸다. 그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는 병원에 찾아오지 않았다. 아이를 잃은 슬픔을, 나는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사랑했던 남자는 이제 없다고. 우리의 5년간의 결혼 생활은 모두 거짓이었다고.
그의 내연녀는 나를 절벽 아래 바다로 밀어 넣어 모든 것을 끝내려 했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세상이 서은하의 죽음을 애도하는 동안,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취리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제1화
그녀가 수석 레지던트로 출근한 첫날, 그녀 남편의 비밀이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빠의 검은 눈동자를 꼭 닮은 네 살배기 아이, 그리고 그녀가 너무나도 잘 아는 희귀 유전성 알레르기를 가진 채로. 아이의 엄마, 최유라는 명품 핸드백부터 걱정스러우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표정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계산된 모습이었다.
서은하가 아이의 병력을 확인하는 동안, 마음속에서 울리는 싸늘하고 불길한 경고음은 익숙한 사실들이 드러날 때마다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보호자 정보도 기입해 주시겠어요?”
은하는 환자 정보 서류의 빈칸을 가리키며 최대한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애썼다.
최유라는 잘 관리된 손톱으로 펜을 집어 들었다. 플라스틱에 손톱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다. 그녀는 이름을 적은 뒤 클립보드를 책상 너머로 쓱 밀었다. 은하의 시선이 서류 위로 떨어졌다.
강태준.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우연일 거야. 분명 우연일 거라고.
최유라는 은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스치는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재미있다는 걸까? 아니면 동정?
“애 아빠가 아들을 정말 끔찍이 사랑하거든요.”
그녀의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달콤해서 은하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근데 일이 너무 바빠서요. 맨날 출장 다니고. 우리 아들에게 완벽한 가정을 만들어주고 싶은데, 그게 참 마음대로 안 되네요, 그렇죠?”
그 암시는 은하의 심장을 겨냥한 독과 같았다. 은하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최유라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는 전화를 받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지극히 사적인 어조였다.
“어, 자기야. 응, 이제 거의 다 끝났어.”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은하는 그 목소리를 모를 수가 없었다. 강태준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감각이 마비된 손가락으로, 은하는 자신의 휴대폰 액정을 다급하게 눌러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 뭐해?]
답장은 거의 즉시 도착했다.
[중요한 프로젝트 회의 중이야, 자기야. 저녁 약속 좀 늦을 것 같아. 내가 꼭 보상할게. 사랑해.]
최유라의 손에 들린 휴대폰이 다시 한번 울렸다. 그녀는 은밀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
“이제 곧 데리러 온대요.”
그녀가 명랑하게 말했다.
은하는 마치 물속을 걷는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세상이 산산조각 나는 고통 속에서도, 의사로서의 전문성은 그녀를 지켜주는 얇은 방패막이 되어주었다. 그녀는 기계적으로 진료를 마쳤다. 필요한 약을 처방하고, 최유라에게 주의사항을 설명하고, 그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봤다.
진료실 창문 너머로 모든 것이 보였다. 태준의 익숙한 차가 병원 앞에 멈춰 섰다. 그는 차에서 내렸다. 스트레스 가득한 회의를 마치고 나온 지친 모습이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남자의 편안하고 여유로운 미소였다. 그는 아들 준서를 번쩍 들어 품에 안았다. 그 동작은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는 최유라의 뺨에 짧고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그들은 완벽한 가족처럼 보였다. 더없이 행복한 가족.
옆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어린 간호사가 부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와, 저 가족 좀 봐. 남편이랑 아빠 역할 제대로 하네.”
그 순진한 한마디가 은하의 가슴에 박혔다. 마지막 결정타였다. 가족? 그럼 나는 뭐지?
지난 5년간의 결혼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매주 반복되던 ‘고정 출장’. ‘사무실의 야간 비상근무’. 언젠가 극심한 복통으로 쓰러졌을 때, 비행기 안에 있다며 연락이 두절되었던 그 시간. 그는 전부 저들과 함께 있었던 것이다. 모든 시간 동안.
몇 달 전 결혼기념일이 떠올랐다. “나 이제 준비된 것 같아.” 침대에서 그에게 속삭였다. “우리, 아기 가질까?” 그는 말이 없어졌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은 안 돼, 은하야. 회사가 지금 아주 중요한 시기라서. 1년만 더 시간을 줘.”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의대 시절, 그는 나의 가장 치열한 라이벌이자 가장 열렬한 구애자였다. 24시간 당직으로 지쳐있는 내게 죽을 사다 주었고, 과로로 쓰러졌을 땐 곁을 지켰다. 그리고 차갑고 정적만 흐르던 당직실에서, 너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없다며 청혼했다.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진짜 같았다.
기억을 깨부수며 휴대폰이 울렸다. 그였다. 액정 화면에 떠오른 그의 이름은 이제 끔찍한 거짓이 되어버린 사랑의 상징이었다.
은하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새 직장 첫날은 어땠어?”
그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언제나 내게 그랬던 것처럼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때, 전화기 너머로 똑똑히 들렸다. “아빠!” 하고 외치는 준서의 목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최유라의 나지막한 웃음소리.
“프로젝트 팀이랑 저녁 먹는 중이야.”
그가 태연하게 말했다.
“좀 시끄럽네. 보고 싶다.”
“아빠!”
준서의 목소리가 이번엔 더 가깝게 들려왔다.
태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 그냥 동료 아들이야.”
그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창밖으로, 그가 아이를 품에 안고 이마에 입을 맞추는 모습이 보였다. 더없이 자애로운 아버지의 표정.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결코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던 표정.
심장이 부서지는 게 아니었다. 돌처럼 굳어버렸다. 나는 친한 친구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변호사에게도 전화하지 않았다. 나는 취리히의 저명한 의학 연구 펠로우십 프로그램 책임자의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태준과 함께 있기 위해 미뤄두었던, 6개월간의 몰입 프로그램이었다.
책임자가 전화를 받았을 때, 내 목소리는 섬뜩할 정도로 차분했다.
“펠로우십 제안을 수락하고 싶습니다.”
내가 말했다.
“바로 떠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