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씨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 고성수는 한 장의 서류를 심서연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이혼 합의서야. 한 번 보고 문제 없으면 사인해."
심서연은 그 서류를 바라보면서 눈동자 깊숙한 곳에 어둠이 일렁였다. "정말 꼭 이혼해야 해요?"
그 말에 남자는 미묘하게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비웃음 섞인 어조로 말했다. "아니면? 이 결혼은 애초부터 할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한 가짜 결혼이었잖아."
고성수는 그렇게 말하며 옆에 앉은 여자의 손을 잡더니 부드러운 온기가 깃들어 있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게다가 다빈이가 돌아왔어. 난 하루빨리 다빈이한테 명분을 만들어주고 싶어."
심서연은 고개를 들어 남편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첫사랑을 바라보았다. 강다빈, 고성수와 함께 자라온 소꿉친구이자, 그의 전 여자친구이다.
3년 전, 고씨 가문과 강씨 가문은 혼약을 맺었다.
그러나 약혼식을 앞둔 날, 고성수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부러졌고, 평생 하반신을 쓰지 못할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 소식을 들은 강씨 가문은 곧바로 혼약을 파기했고, 강다빈을 해외로 보냈다.
강씨 가문의 그토록 매정하고 냉정한 처사에도, 고성수는 여전히 강다빈을 잊지 못했다.
그러니 이제 강다빈이 돌아왔으니 그는 하루빨리 심서연과의 결혼 생활을 정리해 강다빈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두려 했다.
한편, 강다빈은 옅은 아이보리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미소를 지을 때 입가에 살짝 패이는 보조개가 마치 연약한 실꽃처럼 부드러웠다.
확실히 아름다웠다.
고성수가 오랜 세월 동안 그녀를 잊지 못할 만 했다.
심서연이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자, 강다빈은 간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서연 씨, 저랑 성수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예요. 부디 저희가 함께 하도록 도와주세요."
당시 고성수가 다쳤다는 이유로 해외로 도망쳤던 사람이, 이제 그가 다시 회복한 걸 보자마자 돌아와서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라 말하고 있다.
심서연은 냉소를 흘리며 시선을 고성수에게 옮겼다. "알겠어요. 이혼해 줄게요. 하지만 나도 고씨 가문에 3년이나 있었으니 빈손으로 나갈 순 없죠."
어린 시절, 윤경선 노부인이 운영하던 고아원에서 도움을 받았던 인연 때문에, 그 분이 부탁하자 심서연은 주저 없이 고성수에게 시집을 갔다.
결혼 후에도, 그녀는 정성껏 살림을 돌보며 헌신적인 아내로 살아 왔다.
고성수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 고통을 견뎌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심서연의 마음에도 어느새 작은 불씨가 피어났다.
하지만 3년이 지나도록, 그녀는 고성수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확실히 놓아야 할 때였다.
다만, 심서연이 지난 3년간 고씨 그룹의 상장을 성사시키며 쏟은 노력의 대가만큼은 받아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헌신이 짓밟히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고성수는 코웃음을 치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짙은 연기 속에서 그의 냉담한 얼굴이 더욱 차갑게 빛났다. "걱정 마. 너를 손해 보게 하진 않아. 이혼 합의서에 서명만 하면 위자료 14억과 강변 전망의 별장 두 채를 줄게."
고성수는 심서연을 좋아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두 다리를 쓸 수 없던 그 시절, 그녀는 묵묵히 곁을 지켜준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제 이렇게 끝내면 서로 깨끗하게 정리되는 셈이었다.
"이틀 줄게. 생각해보고 더 요구할 게 있으면 말해."
"생각할 필요 없어요." 심서연은 곧장 펜을 들어 화려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내일 아침에 바로 집을 나갈게요. 두 분 소원을 이루어 줄게요."
고성수는 그녀의 눈치 빠름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인정하건대, 심서연은 완벽한 아내였다. 단정한 외모, 순종적인 성격 그리고 살림도 깔끔하게 잘하는 편이다.
하지만 성격이 너무 밋밋했다. 심서연은 마치 프로그램이 정해진 로봇처럼, 하루 종일 부엌과 거실만 맴돌았다. 무미건조하고, 생기 없고 단조로웠다. 그녀와 함께 있는 건, 숨이 막힐 정도로 지루할 따름이었다.
고성수가 원하는 건, 영혼을 교감하고 서로의 숨결을 나눌 수 있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오직 강다빈뿐이다.
고성수가 이혼 합의서를 거둬들이며 몇 마디 인사말을 하려던 순간, 옆에 있던 강다빈이 그의 소매를 살짝 붙잡았다.
"성수야. 사실... 그 별장, 나도 정말 마음에 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