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축복을 받아야 하는 임신이지만,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강시영은 축하 받을 자격조차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임신 검사 결과 보고서를 쥔 채 진료실을 나섰다. 조금 전의 충격에서 여전히 헤어 나오지 못한 듯 두 다리는 쉴 새 없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난 주, 5년 사귄 남자 친구와 결혼식을 올린 그녀는 첫날 밤에 남자 친구의 외도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의 휴대폰에는 강시영 몰래 만난 여자와 친밀하게 찍은 사진들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엄청난 충격에 술로 고통을 달랜 그녀는 몽롱한 상태에서 호텔 방마저 잘못 들어갔고, 다음 날 아침 낯선 남자 옆에 누워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날 밤, 강시영은 하룻밤을 보낸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지 못했지만, 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세와 넓고 화려한 방에 당장이라도 잠식될 것 같은 기분을 느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아침이 되자 당혹감과 부끄러운 마음에 강시영은 남자의 얼굴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호텔 방에서 빠져 나왔다.
그러나 단 하룻밤의 실수로 낯선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조차 잡지 못한 강시영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리는 소리에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발신자는 그녀의 남편 박용태였다.
"시영아, 지금 병원 앞에 도착했어. 기다리고 있을게."
강시영은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뒤 조용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며칠 동안 메스꺼움과 현기증이 계속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그녀는 병원을 찾았고, 예상하지도 못한 임신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강시영은 병원 밖으로 나오자마자 건물 앞에 주차된 박용태의 검은색 벤츠를 발견했다.
자리에 우뚝 멈춰 선 그녀는 길게 심호흡한 뒤 빠르게 주차되어 있는 차로 향했다.
훤칠한 키와 다부진 몸매에 검은색 맞춤 정장까지 입고 운전석에서 내린 박용태가 직접 그녀를 위해 조수석 문을 열어줬다.
"의사는 뭐래?" 그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가벼운 위염이라네." 강시영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소에 매운 음식만 그렇게 먹더니. 앞으로 자극적인 음식은 피하는 게 좋겠어. 위염에도 좋지 않잖아."
강시영은 작게 고개만 끄덕였고, 차에 탄 순간, 코끝에 은은하게 맴도는 향수 냄새를 맡았다.
평소 방향제도 사용하지 않는 박용태였기에 은은한 향수 냄새는 한 가지 사실밖에 의미하지 않았다. 그의 차에 강세영이 아닌 다른 여자도 탄 적 있다는 것이다.
박용태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집에 데려다 줄 테니 쉬고 있어. 난 다시 회사로 돌아가 봐야 해."
"음."
차가 신호등 앞에 멈춰 서있는 동안, 박용태는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자리에서 가볍게 몸을 움직인 강시영은 부드러운 무언가가 손끝을 스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손을 시트 아래로 뻗자 분홍색 실크 스카프가 손에 만져지는 것이다.
눈을 가늘게 뜬 그녀는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익숙한 스카프를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봤다. 박용태의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에서 본 적 있는 스카프였다.
통화를 마친 박용태는 다정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봤다. "회의 때문에 너를 집에 데려다 주고 다시 회사로..."
강시영은 스카프를 그의 얼굴 앞으로 들이밀며 날카롭게 물었다. "이건 누구 거야?"
박용태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언뜻 스치더니 이내 싱긋 미소 지어 보이며 말했다. "오늘 아침에 만난 고객님이 차에 두고 간 것 같아. 내일 돌려드려야겠네."
그가 스카프를 낚아채려 했으나, 강시영은 팔을 뒤로 숨기며 다시 입을 열었다. "박용태, 우리 이혼하자."
박용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시영아, 그냥 스카프일 뿐이잖아. 왜 갑자기 과민 반응하는 거야? 이혼이라는 말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입에 올릴 수 있어?"
그의 뻔뻔한 반응에 강시영은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 "언제까지 날 속일 생각이야? 결혼 첫날 밤에도 그 여자를 만나러 간 거,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넋을 잃은 눈빛으로 강시영을 바라보는 박용태의 얼굴에 드물게 혼란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 "네가 오해 한 거야. 그날 회의가 급하게 잡혀 회사에 다녀왔을 뿐이야."
강시영은 그의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은 기색이었다. 박용태는 그녀를 배신했고,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강시영은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을 봐서라도, 잘 마무리했으면 좋겠어."
말을 마친 그녀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운전석에서 손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핸들을 세게 움켜쥔 박용태는 분노를 이기지 못한 나머지 핸들을 힘껏 내리쳤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강시영은 거실에 걸려 있는 결혼사진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거실 벽 바로 가운데 걸려 있는 액자 속에서, 두 사람은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이제 와 보니 우습기 그지없는 사진이었다.
결혼식을 성공적으로 마친 첫날 밤, 그녀는 박용태가 임신아와 함께 침대에서 노골적으로 뒹구는 사진을 받았다.
몇 장의 사진은 결혼식을 막 끝마친 강시영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고, 5년간의 추억은 배신과 울분으로 변해 있었다.
강시영은 조여 오는 가슴을 움켜잡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꽉 깨문 입술 사이로 억누르고 있던 괴로움과 서러움이 쏟아져 나왔고, 두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텅 빈 방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몰려오는 건 공허함과 허탈함뿐이었다.
그날 밤, 박용태는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일찍이 침대에 누운 강시영은 내색조차 하지 않았고, 박용태의 넓은 가슴이 등에 닿는 느낌을 확인하고 나서야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는 쌀쌀한 바깥 공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팔로 그녀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시영아, 우리 이제 그만 싸우자. 오늘 일은 내가 잘못했어.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약속 할게. 사랑해."
그의 스킨십이 역겨웠던 강시영은 일부러 몸을 움직여 그의 손길에서 벗어났다.
낮게 웃음을 터뜨린 박용태는 잠옷을 벗더니 그녀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이제 생리도 끝난 거 같으니, 첫날 밤에 못 한 거 마저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