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섭에게 이혼 서류를 건네던 날, 내 심장은 이미 얼어붙은 지 오래였다.
8년의 짝사랑과 3년의 비밀 결혼 생활 동안, 나는 그에게 철저히 무시당하는 투명 인간일 뿐이었다.
내 생일날 밤조차 그는 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태블릿 PC에서 려예솔의 사진으로 가득 찬 비공개 폴더를 발견했을 때, 나는 내 결혼 생활이 기만이었음을 깨달았다.
결정적으로 내가 교통사고로 피투성이가 되어 전화를 걸었을 때도, 그는 손가락을 다친 려예솔에게 달려가느라 내 연락을 무시했다.
그에게 내 목숨은 그녀의 엄살만도 못한 것이었다.
더 이상 비참해질 이유는 없었다.
나는 병원 로비,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에게 이혼을 선언하고 려예솔과의 관계를 폭로했다.
"오빠, 이제 그만해. 당신의 추한 사랑놀음에 더는 장단 맞춰주지 않을 거야."
뒤늦게 모든 진실을 깨닫고 폐인이 되어 무릎 꿇고 매달리는 그를 보며, 나는 차갑게 웃어주었다.
이제 지옥 같던 짝사랑을 끝내고, 완벽하게 남이 될 시간이었다.
제1화
차라임 POV:
도원섭에게 이혼 서류를 건네던 그날, 내 심장은 이미 얼어붙은 지 오래였다.
나는 조용한 변호사 사무실 문을 열었다. 실내에는 은은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지만,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옅은 회색 소파와 유리 테이블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엄규 변호사는 나를 보자마자 차분하게 맞이했다.
"차라임 씨, 안녕하세요. 모든 서류 준비되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사무적이었지만, 나는 그 속에서 묘한 동정을 읽었다. 그는 도원섭의 오랜 친구였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어쩌면 더 이상 할 말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죠."
내가 나지막이 읊조리자 엄규 변호사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은 나에게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할 기회를 주려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8년의 짝사랑과 3년의 비밀 결혼 생활. 그 모든 것이 이제는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네, 서류를 진행해 주세요."
내 목소리는 예상보다 더 확고했다. 엄규 변호사는 파일철을 내밀었다. '이혼 합의서' 라고 적힌 글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손끝이 살짝 떨렸지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서류를 받아든 내 손에는 차가운 종이의 질감만이 느껴졌다. 내 삶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는 기분이었다. 이제 이 종이 한 장이면, 지옥 같던 결혼 생활이 끝날 수 있었다.
변호사 사무실을 나선 나는 병원 로비로 향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내 인생을 뒤흔들었을 이혼 서류를 받아들고도, 나는 놀랍도록 평온했다. 아니, 평온해 보였다. 내 안의 모든 감정은 이미 메말라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손에 든 서류 뭉치를 내려다봤다. 맨 위에는 '병원 근처 아파트 명의 이전 서류' 라는 제목이 인쇄되어 있었다. 물론, 이것은 위장일 뿐이었다. 진짜는 그 아래에 숨겨진 차갑고 날카로운 '이혼 합의서' 였다.
그때, 저 멀리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도원섭. 그는 누군가와 통화하며 웃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내가 본 적 없는 부드러움이 배어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근심을 잊은 듯한 표정. 그 모습에 내 심장은 다시 한번 차갑게 식었다. 그는 여전히 려예솔과 통화 중일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의 시야에 닿지 않는 곳에 잠시 멈춰 서서 그를 지켜봤다. 그리고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아무것도 아닌 척, 평소와 다름없는 흉부외과 펠로우 차라임으로 돌아가야 했다.
"차 교수님!"
내가 그를 불렀을 때, 그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는 늘 그랬듯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저 동료에 대한 예의였다.
"차 교수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는 여전히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나는 다가가서 서류 뭉치를 그에게 내밀었다.
"부모님께서 말씀하신 병원 근처 아파트 명의 변경 서류입니다. 교수님께서 직접 확인하시고 사인해주셔야 한다고 해서요."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그의 눈은 서류 뭉치를 훑었지만, 내용을 제대로 읽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관심은 여전히 휴대폰 너머의 목소리에 있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펜을 찾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였다. 나는 미리 준비한 펜을 그의 손에 쥐여줬다. 그의 손가락이 서류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가 서류를 테이블에 놓고 펜으로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그를 지켜봤다. 그의 눈은 여전히 휴대폰 액정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삑-
서류에 사인을 마친 그의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그는 주저 없이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내가 그에게서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진심 어린 미소였다.
"고맙습니다, 차 교수님."
그는 서류를 내게 건네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했지만, 그 따뜻함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서류 뭉치를 다시 받아들었다. 마지막 장에 선명하게 찍힌 그의 사인. 내 손은 떨렸지만, 이번에는 비참함 때문이 아니었다. 해방감과 함께 오는 묘한 허탈감이었다.
그는 서류를 넘겨준 후, 또다시 통화에 열중했다. 그의 시선은 이미 나를 떠나, 병원 로비 한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려예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예솔은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천진난만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녀의 미소는 언제나 도원섭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들의 세상은 언제나 저렇게 완벽하게 돌아갔다. 나는 그 세상의 불청객일 뿐이었다. 도원섭에게 나는 그저 직장 동료이자, 부모님의 등쌀에 떠밀려 결혼한, 존재감 없는 아내였다. 그는 내가 이혼 서류에 사인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아니, 알 필요도 없었다. 그에게는 려예솔이 전부였으니까.
내 생일이었다. 매년 그랬듯, 그날도 나는 혼자 저녁을 준비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오지 않았다. 예솔이 연주회 리허설 중 손가락을 다쳤다는 연락을 받고 라임과의 약속을 잊은 채 달려갔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그의 태블릿 PC에서 예솔의 사진들로 가득 찬 비공개 폴더를 발견했다. 그 순간, 내 8년 짝사랑과 3년의 결혼 생활이 철저히 기만당했음을 깨달았다. 더 이상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혼을 결심했다.
나는 돌아서서 로비를 빠져나갔다. 내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한 달의 숙려 기간이 지나면, 나는 더 이상 도원섭의 아내가 아니었다.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를 사랑하는 내 마음은 이미 죽었다. 이제는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할 때였다.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솔아, 괜찮아? 손은 좀 어때?"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내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나는 순간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상관 없었다. 그의 다정함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에게서 자유를 뺏어오는 것뿐이었다.
"오빠, 나 괜찮아. 다 오빠 덕분이야."
려예솔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뒤따랐다. 그 소리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들은 서로에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완벽한 그림에서 영원히 지워질 존재였다. 한 달 뒤, 나는 미련 없이 이 관계를 끝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