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온몸에서 나른한 기운이 풍겼으며, 눈꺼풀조차 들어 올리기 귀찮은 듯했다.
사진 한쪽에는 누군가 건배를 하듯 술잔을 들어 올린 손이 찍혀 있었다.
서하율의 시선이 그 손에 고정되었다. 분명 여자의 손이었으며, 손목에 찬 비취 팔찌는 그녀에게 익숙한 물건이었다.
원래 서씨 가문에서 며느리에게 물려주는 보물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여자의 손목에 걸려 있었다.
서하율이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단체 채팅방에 영상이 올라왔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영상을 눌러 확인했다.
영상에서는 비취 팔찌를 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교가 살짝 섞였지만, 은근히 떠보는 듯한 뉘앙스가 배어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내 생일 파티에 와줘서 고마워. 근데 집에 안 돌아가도 돼? 형수님이 화내면 어쩌려고? 형수님도 불러서 같이 놀까?"
영상 속 윤도현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그 여자가 네 기분을 망칠까 봐 걱정되지 않아?"
그러자 누군가 바로 맞장구를 쳤다.
"형수님은 우리 자리랑 안 어울려. 부르지 않는 게 좋겠어."
또 다른 사람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도현아, 서하율과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야? 밖에서 마주쳐도 못 알아보는 거 아니냐?"
윤도현은 술잔을 들고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며 무심하게 말했다. "만나? 나랑 그 여자는 정기적으로 안부를 주고받을 정도로 친하지 않아."
그러자 누군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너희 부부 아니야?"
그는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듯 낮게 실소를 흘렸다. "나랑 그 여자 사이는 이 술잔 같은 거야. 마시고 남으면 그냥 버리면 되지."
"그래… 이번엔 형수님 안 부를게. 다음에 사과하면 되잖아." 조지안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서하율은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같은 방에 있으면서 굳이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분명 그녀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보낸 것이 틀림없다.
그 채팅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윤도현의 친구들이었고, 조지안은 몇 안 되는 여자 중 한 명이었다.
그녀가 채팅방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조지안이 그녀를 초대했기 때문이다.
채팅방에 들어간 뒤 그녀는 거의 말이 없었지만, 윤도현의 소식은 언제나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있는 자리에는 언제나 조지안도 함께 있었다.
시간은 어느새 깊은 밤이 되었다.
침대에 누운 서하율은 약지에 낀 결혼반지를 무의식적으로 만지작거렸다.
반지의 차가운 감촉이 피부를 타고 스며들어 마음까지 파고들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가슴을 눌렀다. 답답하고 숨쉬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가슴 한쪽이 조여 왔다.
눈가가 따끔거리자 어둠 속에서 서하율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렸다.
2년 동안 이어진 냉담함과 거리감에 이미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억울함이 불쑥 치밀어 올랐다. 이유도 없이 밀려드는 억울함은 밤안개처럼 조용히 스며들어 온몸을 적셨다.
그녀는 몸을 돌려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반지가 서하율의 뺨에 닿았고, 차가운 감촉은 윤도현의 체온을 떠올리게 했다.
그의 체온도 이와 같았다. 겨울밤의 달빛처럼 차갑고 고요했다.
공기가 정체된 것 같았고, 시간마저 끈적하게 느껴졌다.
눈을 감은 서하율은 자신의 심장이 천천히 뛰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와 윤도현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였다.
그녀가 10살이 되던 해,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친척들은 그녀의 양육권을 두고 크게 싸웠다. 아니, 양육권이라기보다 그녀가 가진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부모님의 장례식 날, 친척들은 그녀의 재산을 두고 서로 멱살을 잡으며 싸움을 벌였고, 결국 머리가 터지고 피가 튀는 난장판 끝에 경찰에 끌려갔다.
서하율은 버려진 강아지처럼 홀로 서서, 억울하고 무기력했다.
윤씨 가문의 최명숙 노부인은 그런 서하율이 안쓰러웠는지 그녀를 가엾게 여겨 입양했다.
입양이라고는 했지만, 정식 절차를 밟은 것은 아니었고, 그저 그녀를 윤씨 저택으로 들인 것에 가까웠다.
그때의 서하율은 예민하고 자존감이 낮았으며, 자신이 짐덩어리라고 생각했다.
학교에는 항상 그녀를 괴롭히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순진하면서도 잔인한 악의를 품고 그녀를 부모 없는 고아라고 놀렸다.
윤도현은 학교에서 서하율을 괴롭히던 아이들을 쫓아내며 그녀를 지켜주었다.
그러다 보니, 자존감이 낮고 온통 상처투성이였던 그녀의 마음도 그에 의해 치유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 윤도현은 그녀의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았고, 잡초처럼 미친 듯이 자라 더 이상 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과 그의 차이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마음을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숨겨 두는 수밖에 없었다.
3년 전, 윤씨 가문 최명숙이 병에 걸렸다. 임종을 앞두고도 노부인은 서하율을 가장 걱정했다. 서하율이 좋은 곳에 시집가는 것을 꼭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와 윤도현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그때의 서하율은 생애 어느 때보다 기뻤다.
그녀의 청춘은 온통 윤도현으로 가득했다. 다정하고, 빛나고, 누구보다 훌륭했던 그가 자신에게 이토록 잘해주었는데, 어떻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쩌면 흔들리는 게 너무도 당연했을 것이다.
그녀의 남편이 된 윤도현은 다정함을 꿀처럼 달콤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녀를 노르웨이 협만의 아침 안개를 보러 데려갔다.
스코틀랜드 고원에서는 헤더를 보기 위해 보랏빛 황야를 오래도록 함께 걸었다.
저녁 무렵 가랑비가 내리자, 그는 자신의 트렌치코트를 그녀 머리 위에 살짝 씌워 주었다. 그 순간, 그의 몸의 절반이 빗물에 젖어 들고 있었다.
민박집에 돌아왔을 때, 벽난로의 불이 활활 타올랐다. 윤도현은 쪼그리고 앉아 그녀의 신발에 묻은 진흙을 닦아주었고, 불빛이 그의 옆얼굴에 어른거렸다.
신혼 첫 해가 너무도 아름다웠기에, 서하율은 지금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만약 그 따뜻했던 한 해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처럼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도, 잊히지 않는 기억도 남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녀와 윤도현이 결혼하기 전, 조씨 가문이 윤씨 가문과 정략결혼을 맺을 거라는 소문이 돌았던 적이 있었다. 조지안은 자주 윤씨 저택에 손님이라며 드나들었고, 때로는 윤도현의 방에서 하루 종일 머물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지안은 해외로 떠났고, 정략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마치 애초에 그런 얘기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기까지 생각한 서하율은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최명숙이 세상을 떠난 뒤, 윤도현은 갑자기 변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하루아침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서로를 모르는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