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에서 내려와 도로로 걸어 나갔을 때, 마침 버스 한 대가 길가에 멈춰 섰다. 하윤서는 급히 달려가 그 버스가 구청을 지나는 것임을 확인하고, 운전사가 출발하기 전에 재빨리 올라탔다.
그녀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버스가 출발한 후에도 한참 동안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완성은 번화한 대도시로, 거리 양쪽에는 높은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20분 후, 하윤서는 구청 앞에서 내렸다.
"윤서야."
버스가 멈추자마자 하윤서는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바로 전 할머니였다.
"전 할머니."
하윤서는 빠르게 전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전 할머니의 옆에 키가 훤칠하고 준수한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본 그녀는 아마 오늘 자신과 혼인신고를 할 상대인 전서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까이 다가간 하윤서는 전서준의 얼굴을 똑똑히 확인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할머니의 손자 전서준은 서른 살이 넘었지만 결혼은커녕 여자 친구도 사귀지 못했다고 한다.
전 할머니는 그런 손자를 걱정하며 홀로 외출했다가 실수로 넘어지는 바람에, 마침 지나가던 하윤서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하윤서는 전 할머니를 병원까지 모셔다 드렸고, 그렇게 두 사람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두 사람이 친해진 후, 전 할머니는 하윤서의 인품을 높이 평가했다. 하윤서가 25살이 되었는데도 남자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전 할머니는 하윤서와 전서준을 이어주기로 결심했다.
하윤서는 전서준이 서른 살이 넘도록 여자 친구도 사귀지 못하는 못생긴 남자라고 생각했다. 전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그는 대기업의 고위 임원으로 수입도 높은 편이라고 했다.
사업에 성공한 남자가 아직도 싱글이라면 눈이 너무 높거나 아니면 성격이 너무 까다롭거나, 혹은 너무 못생겨서 돈만 밝히는 여자도 거들떠보지 않을 정도일 것이다.
하윤서는 전서준이 분명 후자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오늘 직접 만나보니, 전서준은 전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전서준은 매우 잘생겼고, 차가운 분위기를 풍겼다. 전 할머니의 곁에 서서 어두운 얼굴로 서 있는 모습은 매우 멋있어 보였고,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얼음장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멀지 않은 곳에는 검은색 세단이 주차되어 있었다. 동풍 브랜드의 차는 수십억 원짜리 고급차가 아니었기에 하윤서는 전서준과 자신의 경제적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윤서가 언니의 집에 얹혀사는 이유는 언니와 조카가 눈에 밟혀서 차마 떨어져 있을 수 없었다. 사실 그녀의 수입은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고등학교 동창과 함께 완성중학교 앞에 서점을 열었다
완성중학교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통합된 명문 학교로, 재학생 수만 해도 무려 만 명에 이르렀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학습 자료와 각종 문구류의 수요는 매우 많지만, 경쟁도 치열했다. 학교 주변에는 서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한가할 때면, 그녀는 손수 만든 액세서리를 온라인에 올려 판매하기도 했는데, 판매량도 꽤 좋은 편이었다.
한 달 동안 서점의 모든 비용을 제외하고 친구와 수익을 반으로 나누고, 거기에 온라인 스토어의 수입까지 더하면 그녀의 월수입은 안정적으로 400만 원을 윗돌았다.
완성에서 월수입 400만 원은 화이트카라 계층에서도 괜찮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수입을 형부는 전혀 몰랐다.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형부는 그녀의 서점이 돈을 못 번다고 생각했고, 여러모로 그녀를 못마땅해했다. 사실 하윤서는 매달 언니에게 100만 원씩 생활비와 월세 명목으로 주었다.
그녀는 언니에게 그 돈의 절반을 비상금으로 저축하라고 말했고, 형부에게는 절대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언니는 하윤서의 수입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돈을 허투루 쓰지 말고 2년 후에 자신의 집을 마련해 안정적인 삶을 살라고 조언하곤 했다.
"윤서야, 이 아이가 바로 내 손자 전서준이야. 서른 살이 넘도록 결혼도 못 한 노총각이지. 성격이 조금 무뚝뚝하지만, 아주 세심하고 다정한 아이야. 네가 할머니의 목숨을 구해줬고, 우리도 3개월 동안 알고 지냈잖아. 그러니 할머니의 말을 믿어도 돼. 할머니가 결코 나쁜 손자를 너한테 소개시켜 주지 않아."
전서준은 할머니가 자신을 묘사하는 말을 듣고 하윤서를 흘깃 쳐다봤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깊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전 할머니에게 무시당하는 횟수가 너무 많은지, 이제는 이런 말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하윤서는 전 할머니에게 세 명의 아들이 있고, 세 아들이 각각 세 명씩 아들을 낳아 손자가 무려 아홉 명이나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손녀는 한 명도 없었는데, 하윤서가 전 할머니의 목숨을 구해준 인연으로 전 할머니는 하윤서를 손녀처럼 아꼈다.
"전 할머니."
얼굴이 빨개진 하윤서는 전서준을 향해 손을 내밀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전서준 씨, 안녕하세요. 저는 하윤서입니다."
전서준은 하윤서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더니 다시 발끝에서 머리까지 천천히 훑어봤다. 전 할머니가 헛기침을 하며 재촉하자 그제야 하윤서의 손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서준입니다."
악수를 마친 전서준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하윤서에게 짧게 말했다. "제가 바빠서 시간이 없으니 빨리 끝내죠."
그 말에 하윤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 할머니는 서둘러 두 사람에게 말했다. "얼른 들어가서 혼인신고를 하고 오렴. 할머니는 여기서 기다릴게."
"할머니, 밖이 더우니 차 안에서 기다리세요."
말을 마친 전서준은 전 할머니를 부축하며 차량 쪽으로 향했다.
이런 세심한 행동을 지켜본 하윤서는 비로소 전 할머니의 말을 믿기로 했다. 전서준은 겉으로는 차가워도, 속은 세심하고 다정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와 전서준은 완전히 낯선 사람이었지만, 전 할머니는 전서준이 이미 집을 마련했고, 대출도 없다고 했다.
그러니 전서준과 결혼하면 언니의 집에서 나올 수 있고,언니도 마음을 놓을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되면 언니와 형부가 자신 때문에 다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녀에게 결혼이란, 그저 함께 살아갈 사람을 찾는 것일 뿐이다.
곧바로 하윤서의 앞에 나타난 전서준은 짧게 말했다. "가죠."
하윤서는 고개를 끄덕이고 묵묵히 그의 뒤를 따라 구청으로 들어갔다.
혼인신고 창구 앞에서 전서준은 하윤서에게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하윤서 씨, 마음이 바뀌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할머니의 말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결혼은 중요한 일이지, 장난이 아니니까요."
그는 속으로 하윤서가 마음을 바꾸기를 바랐다.
그는 애초에 결혼할 마음이 없었던 데다, 오늘 처음 본 여자와 혼인신고를 한다는 게 영 탐탁지 않았다.
하윤서는 전 할머니가 묘사한 대로 젊고 예뻤으며, 책을 많이 읽은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나 두 사람은 완전히 낯선 사람이었다.
전 할머니는 몇 달 동안 전서준에게 하윤서와 결혼하라고 재촉했다. 어렸을 때 부모님이 바빠 전 할머니의 손에서 자란 그는 전 할머니의 말을 쉽사리 거역할 수 없었다.
전 할머니의 끊임없는 재촉에 못 이겨, 그는 어쩔 수 없이 구청에 오게 된 것이다.
하윤서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전서준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미 결정한 일이니,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며칠 동안 고민한 끝에 결정한 일이니, 하윤서는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