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성의 깊은 밤, 폭우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김지아는 흠뻑 젖은 채 호텔에 도착했다.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정리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고개를 숙여 품에 안은 쇼핑백을 확인했다.
30분 전, 약혼자 장현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셔츠에 와인을 쏟았는데 내일 꼭 입어야 하니 새것으로 한 벌 가져다 달라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쏟아진 폭우에 김지아는 차에서 내릴 때 우산조차 없었다. 다행히 장현우의 새 셔츠는 코트 안에 감싸 둔 덕에 뽀송뽀송한 상태 그대로였다.
그녀는 서둘러 위층으로 올라가 장현우가 있는 객실을 찾았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곧 장현우를 만날 생각에 김지아는 마음이 달콤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그 순간, 긴 팔 하나가 쑥 튀어나와 그녀를 방 안으로 끌어당겼다!
눈앞이 짙은 어둠 속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내 불덩이처럼 뜨거운 몸이 그녀를 덮쳐왔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목을 틀어쥐었고 그녀의 비명은 목구멍 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감히 나한테 약을 타? 죽고 싶어?"
분노가 가득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울리자 김지아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장현우의 목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누구지?'
'왜 장현우의 방에 있는 거지?!'
엄청난 공포가 김지아를 덮쳤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남자의 손목을 붙잡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누, 누구세요. 전 약혼자를 찾아온 것뿐이에요…"
"하, 아직도 거짓말을 해?"
남자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치 벌을 주는듯한 거친 입맞춤이 이어졌고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번졌다. 여자의 달콤한 입술과 섞인 피 맛은 남자의 욕망에 불을 지폈다.
목을 조르던 손이 그의 손이 스르르 풀리더니, 그녀를 번쩍 들어 침대 위로 내던지고는 그대로 그녀 위에 올라탔다.
"안 돼…"
김지아의 비명은 남자의 입술에 금세 흩어졌다. 비에 젖어 축축하고 차갑던 옷이 벗겨졌고 그녀는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던져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차가운 폭우가 내리는 밤, 그녀는 강제로 함께 불타올라야만 했다…
세 시간 후, 폭우가 잦아들었다.
남자가 드디어 김지아의 몸에서 내려왔다. 그의 벗은 상반신에는 방금 전의 격렬했던 상황을 말해주듯 붉고 야릇한 손톱자국이 가득했다.
김지아는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격한 행위 끝에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여린 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둠 속, 남자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네가 기어오른 첫 번째 남자는 아닐 텐데?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계속 조신한 척 연기하는 거야?"
그는 김지아의 얼굴조차 보기 싫다는 듯 곧장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시작했다.
쏴아아, 들려 오는 물소리에 김지아의 흐릿했던 눈동자에 다시 초점이 잡혔다. 그녀는 문에 구멍이라도 낼 듯이 욕실 문 쪽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욱신거리는 몸을 힘겹게 일으켜, 더듬거리며 방의 불을 켰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
화면 잠금을 풀자, 수많은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화면을 가득 채웠다.
메시지 내용을 확인한 김지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뛰쳐나갔다.
잠시 후, 전지훈이 목욕 가운을 걸친 채 긴 다리를 뽐내며 욕실에서 나왔다. 욕구를 해소한 남자의 눈매는 나른했고, 꽤 상쾌한 듯 보였다.
문득,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환하지만 텅 빈 방을 훑어보던 그의 눈매가 위험하게 가늘어졌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이불을 홱 걷었다. 침대 위에는 역시나 아무도 없었고, 선명한 붉은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남자는 순간 멈칫했다.
'이 여자, 처음이었나?'
'말도 안 돼.'
그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오늘 밤 날 함정에 빠뜨린 여자가 방금 도망쳤어. 당장 잡아 와. 내가 직접 처리할 테니까."
부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대답했다. "그 여자는 한 시간 전에 저희가 잡았습니다. 지금 끌고 갈까요?"
전지훈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한 시간 전?"
"네. 회장님 동생분이 매춘부를 매수해 회장님 방으로 들여보내려 한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강제로 당한 것처럼 꾸며 회장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속셈이었죠. 하지만 그 여자는 호텔에 들어가기도 전에 저희에게 붙잡혔습니다…"
부하가 설명을 마친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회장님께서 말씀하신 여자는 누구입니까?"
전지훈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말한 여자가 누구냐고? 나조차도 모르는데.'
그는 다시 침대 시트 위 자국을 보았다. 그 붉은 흔적이 유난히 눈을 찔렀다.
남자의 호흡이 거칠어졌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설마, 내가 정말 그 여자를 오해한 건가?'
병원.
김지아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위층 의사 사무실로 달려갔다. 문을 벌컥 열며 그녀가 물었다. "선생님, 문자 내용은 사실인가요? 저희 엄마에게 장기 이식을 해주겠다던 기증자분이 마음을 바꾸셨다고요?"
의사는 길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한참을 설득했지만, 몸 상태가 안 좋아서 기증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부하시더군요."
김지아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녀의 어머니 계수연은 백혈병 환자였다. 몇 달 전, 장기 이식 검사가 일치하는 골수 기증자를 찾았고 상대방도 기증 의사가 확고해 김지아는 한동안 기쁨에 들떠 있었다.
이식 수술은 바로 오늘 낮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계수연은 이미 1차 수술을 마쳐 골수를 제거한 상태였기에 체내 조혈 시스템이 완전히 파괴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기증자가 변심했다는 건 수연의 목숨을 끊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기증자분과 얘기 좀 나눠보고 싶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의사가 난처한 듯 말했다. "규정상 기증자와 수혜자는 서로 접촉할 수 없습니다."
'그럼 불쌍한 우리 엄마는 어떡하라고? 엄마가 죽는 걸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김지아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의사를 곤란하게 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사무실을 나온 그녀는 곧장 장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씨 가문은 북성에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혹시라도 장현우가 임시로 새 기증자를 찾아줄 수 있지 않을까? 미약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었다.
신호음이 울리자마자 전화는 바로 끊겼다.
김지아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고요한 복도에서 문득 익숙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김지아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녀의 시선은 저 멀리 살짝 열려 있는 병실 문으로 향했다.
'장현우도 병원에 있는 걸까? 그런데 왜 나더러 호텔로 오라고 한 거지?'
수많은 의문이 김지아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녀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쪽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려던 순간, 좁은 문틈으로 보이는 병실 안 풍경이 그녀의 눈에 날카롭게 박혔다.
김지아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