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아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윤다연은 간신히 눈을 떴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낯 선 남자 몇 명이 모여 스피커폰으로 통화하고 있었다.
"그 여자 데려왔습니다. 이제 어떻게…"
전화 너머의 송지훈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유창한 라틴어로 한 남자의 말을 끊었다. "지금 상황이 곤란하니까, 라틴어로 말해."
그 남자가 한참을 생각하다가 서투른 라틴어로 물었다. "송 도련님, 이 못생긴 여자가 도련님께 무슨 죄를 지은 겁니까? 저희가 어떻게 처리하기를 원하십니까?"
"…걔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연구 성과를 훔쳤으니, 너희 마음대로 해도 돼. 하정이 화만 풀리면 3억 원을 바로 보내줄게. 그리고 영상 찍어서 보내줘. 학교 게시판에 올려서 모두가 그녀의 추악한 진상을 보게 할 거야."
라틴어는 윤다연의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번역되었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닫는 순간, 피가 서늘하게 식었다. 그녀를 지금 상황에 놓이게 한 주범은 송지훈이었다! 학비를 대신 내주고, 명품 시계까지 사주며 그의 체면을 지켜주기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내어줬던 남자친구였다.
윤다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고, 몸 곳곳이 따끔거렸다.
아무도 몰랐지만, 윤다연은 송지훈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어 일찍이 라틴어를 따로 배웠다. 그래서 지금 그가 납치범들과 나누는 대화를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말들은 못처럼 그녀의 가슴을 깊이 파고들었다. 소중했던 기억들이 절망감과 함께 한 순간에 스쳐 갔다.
윤다연은 최고의 부잣집 귀한 외동딸이었고, 송지훈은 윤씨 가문 가정부의 아들이었다.
그 해, 송지훈은 엄마를 따라 윤씨 저택으로 들어왔고, 윤다연은 햇살 아래 흰옷을 입은 소년을 처음 보았다. 그 순간 단 한 번의 시선만으로도, 송지훈이라는 이름은 마음 깊숙이 새겨졌다.
하지만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단지 엄청난 신분 차이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속엔 언제나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녀의 이름은 구하정으로, 송지훈과 함께 자란 소꿉친구였다. 그는 구하정을 향한 마음을 숨기지 않고 그녀를 보물처럼 귀하게 여겨 보호했다.
심지어 열여덟 살이 되던 해, 송지훈은 구하정을 구하려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부러졌다. 하지만 구하정은 책임을 피하듯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 시기 송지훈의 부모는 돌볼 여유가 없었고, 7개월에 이르는 입원 기간 내내 그의 곁을 지킨 사람은 윤다연이었다.
겨울부터 여름까지, 깊은 밤부터 새벽까지 함께했던 것도 그녀였고, 그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준 것도, 떨리는 몸을 품에 안아준 것도 모두 그녀였다…
퇴원하던 날, 송지훈이 윤다연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 무렵부터 구하정이 자주 그에게 접근하기 시작했고, 윤다연은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하정은 그녀를 따로 불러 속삭였다. "송지훈은 네가 너무 눈부셔서 부담스러워 해. 그래서 나랑 있을 때가 더 편한 거야."
그 말을 믿은 윤다연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감추기 시작했다. 8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재능도, 재벌가 딸이라는 신분도, 고급 드레스 또한 내려놓고 일부러 촌스럽고 멍청해 보이게 꾸몄다. 모든 것이 송지훈의 곁에 머무르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약혼식 전날 밤, 구하정은 사석에서 눈물을 흘리며 윤다연이 자신의 연구 성과를 훔쳤다고 비난했다.
송지훈은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그녀가 구하정의 성과를 빼앗았다 단정했고, 사람을 시켜 그녀를 납치하게 했다!
"뚜뚜..." 납치범은 전화를 끊고 윤다연에게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윤다연은 겉으로는 겁에 질린 듯 뒷걸음질 쳤지만, 실제로는 도망칠 경로를 은밀히 살폈다.
그녀는 목소리를 떨며 두려운 척 말했다. "풀어줘... 풀어주면 4억을 줄게."
남자는 웃긴 말이라도 들은 듯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세게 잡아챘다. "하하, 너 같은 못생긴 애가 부자인 척한다고? 송 도련님이 너 같은 애를 봐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 꿈도 꾸지 마!"
윤다연은 재빨리 피하며 상대방이 손을 뻗는 순간, 번개처럼 무릎으로 그의 아랫배를 강타했다.
윤다연의 움직임은 소름이 돋을 만큼 빨랐다! "너, 너 어떻게..." 납치범들은 갑자기 눈을 크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얼어붙었다.
윤다연은 손목을 가볍게 돌리더니 멍하니 서 있는 그들을 향해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부터 누가 누구에게 은혜를 베푸는지 보여줄게!"
그 모습을 본 납치범들은 험악한 얼굴로 달려들었고, 굵은 팔뚝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젠장, 죽고 싶어 환장했어?"
윤다연은 눈빛이 섬뜩하게 변하더니 몸을 옆으로 틀고 다리를 들어 힘껏 찼다. "쿵!" 하는 굉음과 함께 납치범은 소리를 지르며 끊어진 연처럼 뒤로 날아가 폐지 더미에 세게 부딪혔다.
다른 납치범의 전기봉이 푸른색 아크를 내뿜으며 달려들자, 그녀는 돌진하는 힘을 이용해 몸을 피했다.
상대방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밀어치는 순간, 남자의 몸은 순식간에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윤다연은 재빨리 주변을 훑어 더 이상의 위협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억눌러온 감정이 터지듯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두려움이 아니라, 증오였다!
"내 딸은 날카로운 발톱을 숨길 필요 없어." 그녀가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며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또한 송지훈의 말도 떠올랐다. "여자가 너무 잘나면 부담스러워." 그 두 말은 윤다연의 머릿속에서 충돌했다.
마음속의 고통이 번져 오히려 정신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천천히 눈물을 닦아냈고, 눈빛에는 증오심이 끓어올랐다.
송지훈이 자신을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는 광대 취급을 했으니, 이 어설픈 사기극은 이제 끝을 볼 때가 되었다!
윤다연은 휴대폰을 들었고, 10분 후. 윤씨 가문의 방탄차가 난장판이 된 길을 천천히 지나갔다. 완전 무장한 경호원들이 축 늘어진 납치범들을 차 뒷좌석으로 끌어올렸다.
그 순간, 휴대폰 화면에 송지훈의 전화가 깜빡였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받았겠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녀는 화면을 흘끗 보기만 한 뒤 무표정하게 통화를 끊고, 번호를 차단 목록으로 옮겼다.
그리고 송지훈 때문에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저번에 말씀하신 정략 결혼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