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 헌신적인 아내는 죽었다.
나는 그곳을 걸어 나왔고,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석 달 후, 나는 법정에서 그의 맞은편에 섰다.
그의 검사 인생 최대의 사건, 그가 기소한 남자의 변호인으로.
그는 자신이 버린 조용한家庭主妇가 법조계의 전설, ‘네메시스’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나는, 그의 완벽한 무패 기록을 박살 낼 참이었다.
제1화
대형 로펌의 세계에서 ‘네메시스’라는 이름은 전설이자 유령이었다.
지난 3년간 법조계는 단 한 번도 패소한 적 없던 그 천재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온갖 추측을 쏟아냈다.
어떤 이들은 그녀가 모든 걸 불태우고 은퇴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이들은 너무 강력한 적을 만들어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고 수군거렸다.
아무도 진실을 맞히지 못했다.
그 진실은 지금, 미니멀한 화병에 백합을 조심스럽고 조용하게 꽂고 있었다.
한때 네메시스로 불렸던 서지우는 이제 서지우라는 이름 대신 강지우로 살았다.
서울중앙지검의 스타 검사, 그 자신만의 완벽한 무패 기록을 가진 남자, 강태준의 아내로.
3년간 그녀는 헌신적이고 평범한 가정주부 역할을 연기했다.
날카로운 정장과 법률 서류철을 상자 속에 봉인하고, 앞치마와 요리책을 꺼내 들었다.
사랑을 위해서였다. 아니, 필사적으로 사랑이 되길 바랐던 무언가를 위해서였다.
결혼은 하룻밤의 공유된 외로움과 그의 의무감에서 태어난仓促한事件이었다.
서지우는 젊고 떠오르는 변호사였고, 모의재판에서 가끔 마주쳤던 그 명석한 검사를 남몰래 동경했다.
언젠가 그의 카리스마 뒤에 숨겨진 연약함의 편린, 그가 감추고 있는 고통을 엿보았다.
자신이 그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틀렸다.
강태준의 고통에는 이름이 있었다. 최유라.
자신의 패션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그를 떠난 셀러브리티 디자이너이자 그의 첫사랑.
그는 결코 그녀를 극복하지 못했다.
그들의 신혼집은 그의 집착이 담긴 박물관이었다.
벽에는 최유라의 사진 한 장 없었지만, 그녀의 존재는 집 안 곳곳에 스며 있었다.
그녀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마시는 커피 브랜드, 그가 틀어놓는 음악, 서지우는 끼어들 틈 없는 추억 속에 잠길 때마다 흐릿해지는 그의 눈빛까지.
서지우는 노력했다.
그의 습관, 그의 취향, 그의 기분을 익혔다.
자신의 모든 전략적 천재성을 단 하나의 이길 수 없는 사건에 쏟아부었다.
바로 남편의 마음을 얻는 것.
하지만 천 일이 넘는 시간 동안 차가운 무관심 속에서, 내 집 안의 정중한 이방인으로 살고 나서야 그녀는 판결이 내려졌음을 알았다.
그녀는 패소했다.
마지막 증거는 어젯밤에 나왔다.
결혼기념일. 강태준은 여느 때처럼 잊어버린 날이었다.
그는 늦게 귀가했다. 비싼 위스키 냄새와 희미하지만 분명한 여자의 향수 냄새를 풍기며.
지금껏 본 중 가장 심하게 취해 있었다.
그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던 거실로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검찰청 동료들이 그와 함께 있었고, 옛날 사건 얘기를 하며 웃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거의 본체만체했다. 마치 가구의 일부인 양 시선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태준 씨, 좀 쉬어야겠어요.”
그녀가 부드럽게 말하며 그를 부축하려 다가갔다.
그는 무거운 몸을 그녀에게 기댔고,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어지러운 순간, 희미한 희망이 피어올랐다.
그가 가까이 있었다. 그가 나를 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키스했다.
그가 가끔 보여주던 의례적이고 순결한 입맞춤과는 전혀 다른, 거칠고 절박한 키스였다.
심장이 갈비뼈를 미친 듯이 두드렸다.
어쩌면. 어쩌면 술기운이 마침내 그의 벽을 무너뜨린 걸지도 모른다.
그가 몸을 떼었다. 그의 눈은 흐릿하고 초점이 없었다.
그는 미소 지었다. 부서질 듯 애틋한, 그러나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닌 미소였다.
“유라야.”
그가 속삭이며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네가 돌아올 줄 알았어.”
그 이름은 물리적인 타격처럼 날아와 박혔다.
그녀 안의 희망은 산산조각 나, 폐부를 채우는 날카로운 먼지가 되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인 동작으로 그를 침실로 데려가 옷을 벗기고 침대에 눕혔다.
그는 마지막으로 유라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순식간에 잠이 들었다.
서지우는 고요한 방 안에 서 있었다.
달빛이 그의 잘생긴 얼굴의 날카로운 선을 그리고 있었다.
온 도시의 찬사를 받는 남자, 정의의 거인.
하지만 그녀에게 그는 공허함 그 자체였다.
자신이 될 수 없는 존재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존재.
그녀는 침실을 나와 그가 절대 들어오지 않는 서재로 향했다.
옷장 깊숙한 곳에서 먼지 쌓인 상자를 꺼냈다.
안에는 그녀의 옛 물건들이 있었다.
서울대 법대 졸업장이 담긴 액자. 모의재판 대회에서 받은 트로피들.
그리고 심플한 검은색 명함 지갑.
그녀는 명함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간결하고 미니멀한 디자인이었다.
서지우 변호사
손안의 명함이 낯설게 느껴졌다.
다른 인생에서 온 유물 같았다.
그녀는 휴대폰을 들었다.
공적인 미소를 띤 거짓된 얼굴의 강태준 사진을 지나쳐 스크롤했다.
3년 동안 한 번도 누르지 않았던 번호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박진수. 뉴욕에 있는 그녀의 옛 멘토.
그녀에게 ‘네메시스’라는 별명을 붙여준 남자.
그녀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심장이 차갑고 규칙적인 북소리처럼 울렸다.
뉴욕은 자정이 넘었지만, 그는 받을 걸 알았다. 그는 늘 늦게까지 일했다.
두 번째 신호음이 울리고 그가 받았다.
“박진수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뚝뚝하고 익숙했다.
“대표님.”
그녀가 말했다. 그녀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거칠었다.
수화기 너머로 긴 침묵이 흘렀다.
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코너 오피스에 앉아, 아마도 입에 시가를 물고,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고 있을 것이다.
“지우?”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맙소사, 정말 너야?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뉴욕 법조계 전체가 네가 지구상에서 사라진 줄 알았다고.”
그의 흥분한 목소리가 그녀의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는 연고 같았다.
누군가 그녀를 기억했다. 누군가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안식년을 가졌어요.”
그녀가 말했다. 세기의 절제된 표현이었다.
“3년짜리 안식년? 네메시스, 넌 안식년 같은 거 안 가져. 넌 상대를 포로로 잡잖아.”
그가 투덜거렸다.
“이류 기업 사냥꾼들 상대할 때마다, 나 혼자 처리하게 두고 떠난 널 저주한다고. 네가 없으니 놈들이 물렁해졌어. 긴장하게 만들 사람이 없으니까.”
서지우는 어두운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피곤한 눈,เรียบง่าย하게 틀어 올린 머리.
부드러운 베이지색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이건 네메시스가 아니었다. 이건 유령이었다.
“그놈은 네가 누군지 알아냈나?”
박 대표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는 그녀의 비밀 결혼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물어본 적 없어요.”
서지우가 대답했다. 그 진실은 텅 비고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를 채우며 마지막 먼지까지 씻어냈다.
“저, 이혼 소송할 거예요.”
또다시 침묵.
그리고 박 대표의 느리고 만족스러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잘했어.”
“그리고 대표님.”
그녀의 목소리가 단단해지며, 옛 강철 같은 resolute함이 척추에 돌아왔다.
“저, 돌아가요.”
“언제?”
“내일 오후에 인천공항 도착해요.”
그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느껴졌다.
“코너 오פי스 비워뒀어. 돌아온 걸 환영한다, 네메시스. 진짜 싸움이 뭔지 놈들에게 다시 보여줄 시간이야.”
그녀는 전화를 끊고 책상 위에 놓인 서명된 이혼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몇 달 전, 필요 없을 거라 생각했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작성해 둔 서류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강태준에게서 온 문자였다.
‘좀 늦어. 유라 씨가 한국에 와서. 저녁 약속 있으니 기다리지 마.’
서지우는 메시지를 보고 답장 없이 삭제했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에 거침없이 서명했다.
자신의 가치를 아는 여자의 서명답게, 날카롭고 자신감 넘쳤다.
끝났다.
가면극도, 결혼 생활도, 결코 자신을 봐주지 않을 남자를 향한 길고 고통스러운 기다림도.
강지우는 죽었다.
네메시스가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