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것뿐이야."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6개월 후에 우리는 지금처럼 다시 부부로 지낼 수 있어. 하린아, 그 사람에게 남은 시간은 6개월뿐이야."
담담하면서도 무심하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통보에 가까웠다. 신하린은 김도준의 옆모습을 한참이나 멍하나 바라봤다.
김도준은 신하린이 그의 요구라면 아무 조건 없이 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듯했다.
애초에 두 사람은 서로를 죽도록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신하린이 어린 시절의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일방적으로 그를 쫓아다닌 끝에 마침내 그와 결혼 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된 후에도 그녀는 김도준의 곁을 맴돌며 절대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신하린은 아직도 그날을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김도준은 신하린의 앞을 막아서며 그녀의 양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다시 하린이 괴롭히면, 절대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야!"
그 모습에 신하린은 김도준에게 마음을 주게 되었다.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거세게 쏟아지는 소나기 속에서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각목을 손에 꽉 움켜쥔 김도준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그녀를 지켜줬다.
그 순간 신하린은 김도준을 평생 사랑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날, 신하린은 완전히 김도준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 뒤로 신하린은 그의 요구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고, 다른 누구보다 완벽하게 실행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칭찬했다.
"하린아, 너무 잘했어."
매번 그의 칭찬과 스킨십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연인이라고 하기도 애매 할 만큼 옅은 감정이었지만 신하린은 김도준의 성격이 원래 무뚝뚝한 탓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그녀가 사랑에 눈이 멀었다 빈정대도 그녀는 두 눈과 귀를 막고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몸과 마음을 그에게 바친 지 7년이 지났다. 1년 전, 김도준의 할아버지 김성호의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김씨 가문 사람들은 어르신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낫게 해줄 방법을 찾아 머리를 맞댔다.
결국 생각해 낸 방법이 김도준의 결혼이었다.
이후 김도준은 신하린을 찾아와 결혼을 요구했다.
그 순간, 신하린은 자신의 끊임없는 노력이 드디어 빛을 발했다고 확신했지만 혼인신고를 하자마자 김도준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그녀를 증오하고 원망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신하린, 내 말 듣고 있어?"
그녀의 눈빛이 공허해진 것을 본 김도준이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를 응시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
그녀가 나긋하게 물었다.
그러나 김도준은 대답 대신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하도 불쌍해서 그래. 지금은 내가 곁에 있어 줘야 할 것 같아."
그의 대답에 신하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럼 나는?"
김도준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그의 눈빛에 귀찮은 기색이 피어 올랐다.
그렇게 3초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6개월밖에 남지 않은 시한부야. 너는 모르겠지만 아직 날 많이 사랑한다고 했어. 우리가 결혼했기 때문에 너에게 상처주기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지 않은 거야. 내가 물질적으로 보상해 주려 해도 싫다고 거절만 한 사람이야. 착한 사람이니까 이번에는 네가 양보해. 내가 널 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지 마."
김도준이 차분하게 내뱉은 말은 그가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더 큰 상처가 되었다.
이미 결혼한 유부남을 유혹하는 게 어딜 봐서 착하다는 건지 이해 할 수 없었고
아내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에게 양보를 하지 않는 게 어디가 매정하다는 건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다.
신하린은 몇 년 전보다 조금 성숙해진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 시절 그녀가 반했던 그윽한 눈빛, 베일 듯 날카롭게 솟아 오른 코, 꽉 다문 입술까지...
'대체 그는 언제부터 변했던 걸까? 아마, 그 여자가 나타난 날부터겠지.'
"꼭 이혼까지 해야겠어?"
신하린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재차 확인했다.
김도준은 대답하지 않고 불쾌한 기색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의 굳게 다문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그래, 너..."
"그래, 알겠어."
신하린은 바로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김도준은 의외라는 듯 눈을 가늘게 뜨더니 추궁하듯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신하린, 날이 갈수록 더 대담해지는 것 같아."
담담하게 말을 내뱉는 그의 목소리에 불쾌한 기색이 묻어났다.
"네 동의가 필요하다는 걸 알아 챈 모양이지? 왜? 협박이라도 하게?"
신하린은 대답하지 않고 벽에 드리워진 두 사람의 그림자를 멍하니 쳐다봤다.
담배를 비벼 끈 김도준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그는 그녀가 어떻게 받아 들일지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고 자신의 요구가 얼마나 무례하고 터무니없는 일인지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신하린이 그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7년 동안 항상 그래왔으니 말이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김도준이 떠나자 거대한 저택에 홀로 남게 되었다.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앉은 그녀는 문이 다시 열리기를 바라며 한참이나 방문을 응시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탁자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 짧게 진동하면서 화면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휴대폰을 확인하자 익숙한 ID가 그녀에게 DM을 보내왔다.
[그가 또 나를 보러 왔는걸?]
짧은 문자와 함께 사진 한 장이 첨부되었다.
유리에 선명하게 비친 김도준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있었다. 그 미소는 신하린이 7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미소였다.
자리에 가만히 얼어붙은 그녀는 천천히 화면을 스크롤 하며 며칠 전에 보낸 메시지도 확인했다. [방금, 아직도 변함없이 날 사랑한다고 했어.]
[비가 많이 내리네... 춥지 않냐고? 아니, 내 곁엔 그가 있으니까. 근데, 넌 어때?]
[남편의 사랑조차 받지 못하는 너. 너야 말로 내연녀야. 신하린 넌 그저 그의 성욕이나 해소시켜 주는 도구에 불과 해. 그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이런 DM은 수도 없이 많이 받았다. 그 것들 하나 하나, 모두 김도준이 이미 자신을 배신 했음을 일깨워 주는 증거들이었다.
지난 7년 동안, 늘 그녀를 차갑게만 대하던 그가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다정할 줄이야... 마치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신하린은 그녀가 맨 처음 보내온 메시지까지 확인했다.
[넌 내가 누군지 알 거야. 오늘 갑자기 거실에 나타난 꽃은 어때? 마음에 들어? 내가 보냈어. 도준이는 그 꽃을 마음에 들어 하더라고.]
신하린은 상대가 누군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한미진, 한 플랫폼에서 재벌이나, 유명인사들의 저택이나 빌라에 꽃으로 포인트를 주며 분위기를 한층 더 밝고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유명 플로리스트다.
이전에 신하린은 김도준에게 메시지를 보여줬지만 김도준은 한미진이 보냈다는 증거가 있냐며 단번에 말을 잘라버렸다.
심지어 그녀가 일부러 부계정을 만들어 한미진을 모함하기 위해 이런 짓을 벌인 게 아니냐고 따지기도 했다.
한미진이 보내온 DM 중에 사진이 첨부된 메시지는 많지 않았고 그 사진 들로는 그녀가 한미진임을 증명하긴 어려웠다.
다만 오늘 그녀가 보내온 사진은 평소와 다르게 보란듯이 둘의 관계를 보여줬다.
'이걸 김도준에게 보여 줘야 하나?'
하지만 이내 휴대폰을 탁자 위에 올려둔 그녀는 서랍 제일 아래에 놓아둔 파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에는 낮에 병원에서 받은 초음파 사진이 담겨있었다.
가장 최악의 순간에 그녀는 김도준의 아이를 임신했다.
어느새 눈물이 가득 차오른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떨어져 초음파 사진을 적셨다.
어차피 단 한 순간도 그녀를 사랑한 적 없는 김도준이다.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그에게 알려도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얼굴에 남은 눈물을 닦아 낸 신하린은 김도준의 라이터로 초음파 사진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김도준을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이혼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7년이란 시간, 그에게서 받은 은혜를 갚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신하린은 더 이상 김도준을 사랑하지 안겠다고 결심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