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첫 경험은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어야만 하는 걸까?
날카로운 통증이 온몸을 찢는 순간, 임하늘은 자신에게 그런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낯선 남자의 거친 움직임에, 그녀는 눈앞이 흐려질 만큼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든 도망 가고 싶었지만 무거운 몸뚱아리는 그녀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악몽 같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한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최소한... 피임이라도... 제발요."
그 말을 들은 남자는 순간 멈칫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움직임은 더욱 거칠고, 난폭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든 게 끝났을 무렵 임하늘은 마지막 남은 기력마저 빼앗긴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호텔 방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지저분한 침대와 녹초가 된 몸, 그리고 몸에 남은 흔적들이 어젯밤에 일어난 모든 일이 현실이었음을 일깨워 주었다.
이건 치밀하게 짜여진 함정이었다. 단순한 손님 접대라고 생각했던 술 자리는, 사실 그녀를 유인하기 위한 계략이었고, 그녀는 술에 취해 거의 정신을 잃은 채 이 방으로 끌려와 유린 당했다.
어젯밤, 그녀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녀가 떠올린 건 출장에서 막 돌아온 남편, 이준재였다. 본능적으로, 거의 반쯤 의식이 끊긴 상태에서도 그녀는 그에게 수 차례 전화했고, 문자도 보냈다. 하지만 그가 전화를 받았을 때, 돌아온 건 차갑고 무심한 목소리뿐이었다. "바빠, 경찰에 신고해."
이준재의 그 차가운 말이 계속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뼈가 시리고 가슴이 찢기는 듯 했다. 오랜 시간 동안 이준재에게 쏟아 부은 그녀의 사랑과 존엄이 처참하게 짓밟혔다.
그녀는 쓰디쓴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침대 이불 속에서 명함 한 장이 툭 떨어졌다.
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그것을 주워들었고, 눈에 익은 로고를 보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이씨 그룹.
어젯밤, 방 안은 어두웠고 그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이준재의 회사와 관련된 사람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설마, 이준재가 이 일과 관련이 있는 건가?
집으로 돌아온 임하늘은 현관 앞에 놓인 익숙한 구두와 외투를 보고 이준재가 집에 돌아왔다는 걸 알았다.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임하늘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2층으로 올라갔다.
마침, 샤워를 마치고 욕실가운을 걸친 채 욕실에서 나오는 이준재를 마주쳤다. 욕실가운만 걸쳤을 뿐인데, 그가 가진 고귀한 분위기는 감춰지지 않았다. 젖은 머리카락, 날카로운 이목구비, 그녀를 바라 보는 시선에는 익숙한 무심함이 서려 있었다.
임하늘을 마주한 순간,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를 바라 보는 눈빛에는 무심함을 넘어 묘한 혐오감까지 스며 있었다. "뭔데?"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하늘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두 사람은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고, 애초에 이어지지 말았어야 할 인연이었다. 3년 전, 이준재의 아버지가 병세가 악화되어 위독했을 때, 임하늘은 자신의 골수를 기증했다. 그 대가로 이준재의 아버지는 그녀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했고
그녀는 그 소원으로 이준재와의 결혼을 택했다.
참 철이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너무 어렸던 그녀는, 이기적인 욕망에 취해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로 차가운 마음도 녹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준재에게 그녀는 실리만 추구 하는 속물에 불과했다.
그는 이기적이고 심계가 깊은 그녀를 증오했다. 결혼한 3년 동안 그는 신혼방을 호텔 드나들 듯이 했고 그녀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으면서도 단 한번도 그녀를 아내라고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임하늘은 그 모든 걸 묵묵히 견뎠다.
어려워진 집안 사정 때문에 그녀는 가녀린 어깨에 많은 것들을 짊어 져야 했기에 그녀는 이준재에게 의지하는 것 외에도 그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차가운 무관심에도 그녀는 항상 자신을 위로 했다. 언젠가는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어젯밤 이후, 그녀는 이제 사랑이란 감정을 마음 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 함정에 이준재가 개입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씨 가문과는 분명히 연관이 있었다. 사실을 따져 물으려고 이 집으로 돌아 왔지만, 막상 그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그녀는 모든 질문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
"준재 씨..." 목이 타 들어 가듯 메마른 목소리가 간신히 새어 나왔지만,
이준재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옷방으로 향하더니 그녀가 정성스레 준비한 옷들을 입기 시작했다.
등을 돌린 채, 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아침이나 준비해. 30분 뒤에 나가야 하니까."
임하늘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준재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준재 씨, 우리 이혼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