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안이 고개를 번쩍 들자, 발코니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탓에 허준혁의 낮게 깔고 차가운 목소리가 문을 통해 들려왔다.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고? 절대 못 해. 자살한다고 난리를 친 것만 벌써 몇 번째인데 피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잖아?"
마지막으로 그녀는 허준혁이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 덫붙이는 것을 들었지만, 목소리가 너무 낮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허준혁이 전화를 끊고 뒤를 돌아보자 마침 서지안과 눈이 마주쳤다.
서지안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진유나를 찾아가지 않았다니…
그러니까, 그는 그녀를 속이지 않은 걸까?
정말 마지막이었던 걸까?
"왜 그렇게 쳐다봐? 이제 곧 결혼식이 시작될 텐데, 준비는 다 됐어?" 호준혁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하지만 서지안은 여전히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호준혁이 선천적인 감정 표현 장애로 앓고 있어서, 많은 경우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풋풋한 설렘부터 지금의 진심 어린 사랑까지, 그녀는 드디어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허준혁에게 있어서 특별한 존재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녀와 결혼까지 약속했을까?
서지안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짱을 끼고 눈가에 웃음이 가득 번졌다. "준혁아, 드디어 우리 결혼하는 거야…"
호준혁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 알고 있어."
대기실 문이 활짝 열렸다.
"이제 신랑 신부가 입장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순식간에 식장을 장악했다.
서지안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호준혁의 팔짱을 끼고 단상으로 향했다.
"우리 다 같이 축복합시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호준혁의 휴대폰 벨 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사회자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번졌고, 하객들은 이미 박장대소를 짓고 있었다.
서지안의 얼굴에 번졌던 미소도 굳었고 이 벨 소리는 그녀에게 있어서 악몽과도 같았는데 진유나의 전용 벨 소리였기 때문이다.
호준혁은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또 무슨 일이야?"
사회자는 서둘러 분위기를 다시 끌어올리려 노력했다. 그는 사회를 맡은 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이런 상황을 겪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돌발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지금 바로 갈게."
허준혁은 한마디를 남기고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순간, 식장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가지 마…" 서지안은 웨딩드레스를 움켜쥐고 그를 뒤쫓으며 애원하듯이 말했다. "지난번에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허준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는데 냉정하게 이익과 손실을 저울질하는 것 같았다.
몇 초 후, 그는 침착하게 그녀에게 설명했다. "유나가 정말 옥상에서 뛰어내렸어. 지금 바로 가봐야 할 것 같아. 하객들을 잘 달래고 있으면 금방 갔다올게."
"허준혁!" 서지안은 그의 손목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지금 가면 이 결혼 안 해!"
허준혁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말했다. "그럼 후회하지 마."
서지안은 심장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느끼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허준혁은 그녀의 눈물을 보고 심장이 살짝 떨렸지만, 그녀가 자신과 타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소와 똑같이
서지안은 그를 포기하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는 서지안이 그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다. 부잣집 아가씨인 그녀는 가족과도 연을 끊고 그와 함께 경성에서 고생하며 지냈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녀는 항상 그의 편에 섰다.
그녀의 가장 큰 소원이 바로 그와 결혼하는 것이다.
게다가, 진유나가 자살 소동을 벌일 때마다 그녀는 그를 대신해 뒷수습까지 해줬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로 그를 협박하는 것을 보니, 정말 다급해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진유나에게 정말 사고가 생긴 것이는 사실이다.
때문에 그는 서지안이 투정부리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허준혁이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달싹였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그는 바로 전화를 받으며 밖으로 달려나갔다.
순간, 하객들은 서로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신랑은 왜 도망간 걸까?
식장이 혼란에 빠진 것을 본 서지안은 눈물을 닦으며 간신히 정신을 차린 뒤, 멍하니 서 있는 사회자에게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오늘 결혼식은 취소되었습니다…"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서지안은 더 이상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오늘이 지나면 자신이 경성에서 가장 큰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서지안이 허준혁을 미치도록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수많은 부잣집 도련님들을 마다하고 가난한 남자와 함께 고생하며 지내더니, 드디어 결실을 맺는가 싶었는데 결혼식 당일 호준혁에게 버림받았다.
서지안이 호텔 밖으로 달려나가자 호텔 입구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진유나는 이미 호준혁의 품에 안겨 있었는데 웨딩드레스를 입은 서지안은 두눈이 퉁퉁 부은 채 넋을 잃고 울고 있었다.
"준혁아, 어떻게 나를 이렇게 혼자 내버려둬? 우리 평생 함께하기로 약속했잖아?"
"그만해." 허준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는데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 표정도 없었다.
진유나는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 칠흑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돼!"
서지안은 진유나의 행동을 보고 호준혁이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도 어렸을 때,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 바라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차갑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누가 내 얼굴 만지는 거 싫어."
차가운 목소리와 무감정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허준혁은 아무런 제지의 행동도 하지 않고 진유나가 그의 잘생긴 얼굴을 마음껏 만지게 내버려 두었다. 결국 진유나는 눈물을 닦고 환하게 웃었다.
서지안은 호허준혁에게 감정 표현 장애가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차갑고 무관심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진유나를 품에 안고 구급차에 오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광대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하루하루, 해가 거듭될수록 언젠가는 허준혁의 차가운 마음을 녹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결국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차갑고 아름다운 눈동자에 그녀에 대한 기쁨과 관용이 가득 담길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녀는 처참하게 버림받았다.
허준혁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다만 그녀에게만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서지안은 웃음을 터뜨리며 눈물을 흘렸다.
지난 5년 동안.
그녀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서지안, 너는 정말 순진하고 어리석은 놈이야.'
지난 5년은 그저 그녀의 허황된 꿈이었다.
이제 그 꿈이 깨졌으니,
그녀도 깨어나야 할 때가 되었다.
서지안은 대기실로 돌아와 웨딩드레스를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결혼식의 혼란으로 인한 여파가 여전히 강했기 때문에, 서지안이 사무소로 돌아왔을 때, 활발하게 토론하던 동료들은 그녀를 보더니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서지안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원래 낯이 두꺼운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 법학과의 천재 소년인 허준혁을 쫓아다닐 때부터, 그녀는 이미 학교 전체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녀는 용감하게 굴하지 않고 앞으로 밀고 나아갔지만, 이제야 허준혁이 본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지안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에서 사직서를 출력하고 자신의 이름을 서명한 뒤, 허준혁의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막 사직서를 내려놓았는데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호준혁의 전화였다.
"듣기로 네가 결혼식을 취소했다고 하던데, 왜 미리 나랑 상의하지 않았어? 사무소에 얼마나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
"결혼식을 취소하지 않으면 그럼 어떻게 해야 했을까?" 서지안은 차갑게 반박했다. "그 많은 하객들을 호텔에 앉혀 놓고 네가 영웅처럼 나타나길 기다려야 했어?"
허준혁은 서지안이 자신에게 반박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 몇 초 동안 벙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지안은 작은 태양처럼 그의 주위를 맴돌며 재잘거렸다. 그녀는 항상 활기 넘치고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그에게 화를 낸 적도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잘못했어." 허준혁은 항상 이성적이고 침착했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서지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그때 정말 하룻 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어떻게 선천적으로 감정이 메마른 사람을 그녀를 사랑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서지안은 책상 위에 놓인 사직서를 흘깃 쳐다봤다. "허준혁, 내 사직…"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에서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아, 나 허리가 너무 아파. 빨리 와서 좀 주물러 줘."
"지금 바쁘니까 이만 끊을게."
곧바로 전화기 너머에서 '뚜뚜'하는 통화 종료음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