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현 씨, 이분은 윤 대표님이자 사모님이세요. 어서 사모님께 사과드리세요."
강태준의 비서인 김현우가 재빨리 다가와 여자를 떼어놓자, 여자는 잠시 놀란 듯하더니 이내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윤 대표님, 안녕하세요. 저는 이지현이라고 합니다. 강 대표님께서 후원해 주시는 대학생인데, 감사하게도 대표님 곁에서 인턴으로 일할 기회를 주셨어요. 방금은 방문 예약 안내를 받지 못해서 규정대로 처리하다 보니 대표님을 막게 됐는데,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녀는 무고한 눈빛을 지었지만, 말 속에는 미묘한 뉘앙스가 숨어 있었다.
윤서진은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손에 시선이 멎었다. "네일 컬러가 예쁘네요."
차분한 블루 톤에 잔잔한 펄이 들어간 색이었다. 어제 강태준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에 남아 있던 색과 완전히 같았다.
어젯밤 함께 저녁을 준비하던 중 그걸 보고 물었을 때, 그는 잉크가 묻은 거라며 아무렇지 않게 넘겼고,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지현은 황급히 두 손을 등 뒤로 숨기며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그 순간, 윤서진은 그녀의 귓가 아래 새하얀 목덜미에 아주 진한 키스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가장자리에는 이 자국으로 인한 멍까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연애한 지 4년이라, 윤서진은 강태준의 작은 버릇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수많은 밤, 그는 감정이 격해질 때마다 그녀의 귓가에 깊게 입을 맞추고, 욕망을 억누르며 참기 힘들다는 듯 낮게 속삭였다.
"여보, 도대체 언제쯤 준비되는 거야? 정말 원해… 이제 진짜 못 참겠어."
윤서진은 지난 몇 년간 몸이 많이 상해 있었고, 자궁에도 큰 손상을 입은 적이 있어 당장 임신이 어려운 상태였다.
게다가 강태준은 콘돔 알레르기가 있었고, 일까지 바빴기 때문에 두 사람은 결혼한 지 2년이 지났지만 끝까지 관계를 이어 가지 못한 채 지내왔다.
매번 강태준이 욕구를 참으며 찬물로 샤워하러 갈 때마다, 윤서진은 미안하면서도 고맙고, 동시에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그래서 강태준이 아이를 갖자고 제안하며 그녀에게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몸조리에 전념하라고 했을 때, 윤서진은 아무런 불만 없이 받아들였다.
지난 6개월 동안 윤서진은 쓴 약을 마시며 몸을 추스르면서도, 마음속에는 달콤한 기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밤, 두 사람의 첫날밤이었다. 그녀는 평소라면 절대 입지 않았을 란제리까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미리 준비해 두었다.
하지만 강태준은 그녀를 위해 참고 있었던 게 아니라, 이미 밖에서 다른 방법으로 욕구를 풀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에게서 들은 그 말,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이 마치 따귀처럼 윤서진의 뺨을 세게 때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서 있었다.
"윤 대표님, 강 대표님께서는 지금 백 도련님과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어서 들어가 보시죠."
윤서진이 정신을 차렸을 때, 김현우는 이미 못마땅한 표정의 이지현을 끌고 자리를 떠난 뒤였다.
윤서진은 한 걸음씩 대표 사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사무실 문을 밀어 열자, 문틈으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대역으로 쓰는 건 그렇다 쳐도, 옆에 두고 지내는 건 너무 대담한 거 아니야? 서진이한테 들켜서 문제 생기면 어쩌려고."
백준서의 목소리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윤서진의 발은 바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온몸에 한기가 퍼지며 이가 부딪혀 달달 떨렸다.
강태준이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심지어 자신의 친 오빠까지 알고 있었다.
"걱정 마, 준서 형. 진이는 나 완전히 믿어. 날 그렇게 사랑하고, 또 순해서 나 없으면 못 살아. 문제 될 일 같은 건 절대 없을 거야. 게다가 진이가 지금은 집에서 임신 준비에만 신경 쓰느라 다른 데 신경 쓸 겨를도 없어."
강태준의 목소리는 낮고 매력적이었지만, 그 말에는 자신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 말투는 마치 독침처럼 문을 뚫고 윤서진의 심장에 날아와 박혔고, 한 마디 한 마디가 피를 흘리게 하는 듯했다.
"그렇지 뭐. 예전에 채영이가 사람 시켜서 서진이 처리하려고 했을 때, 칼에 두 번이나 찔려서 자궁까지 잃을 뻔했잖아. 해성에서 걔가 애 못 낳는다는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네가 돌봐주지 않았으면, 무릎까지 꿇고 청혼하고 해외로 데리고 나가 달래주지 않았으면 우리가 채영이 뒷수습할 시간이나 있었겠어? 만약 채영이가 그 일로 감옥이라도 갔으면 인생 망칠 뻔했지. 그래도 너, 채영이한테는 나름 진심이긴 하다. 근데 채영이는 성격 알잖아. 눈에 흙 들어가는 꼴 못 보는 타입이라, 서진이처럼 다 받아주는 애랑은 달라. 자기랑 비슷한 여자 옆에 두는 건 절대 못 참을걸!"
"그냥 잠깐 데리고 노는 거야. 채영이 돌아오면 내가 알아서 정리할게."
"네가 알아서 한다니까 다행이네."
문손잡이를 잡고 있던 윤서진의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려 왔고, 발끝에서부터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다.
그녀의 심장이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쥐인 듯 짓눌리고 내동댕이쳐져 산산조각 나는 것만 같았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고, 허리까지 힘이 빠져 그대로 몸이 굽어졌다.
윤서진은 백씨 가문의 딸이었지만, 17살이 되어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얌전하게 굴고 살갑게 굴며 비위를 맞추려 노력해도, 부모와 두 오빠의 마음은 늘 가짜 딸인 백채영에게만 향해 있었다.
다행히 할머니만은 그녀를 아껴주셨다.
18번째 생일에 할머니는 백씨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옥팔찌를 윤서진에게 건넸다. 그러자 백채영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울고불고 난리를 쳤고, 결국 부모는 백채영에게 100억 원짜리 호화 별장을 사주며 달래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서진은 밤길에 귀가하던 중 깡패 몇 명과 마주쳤다. 그들은 그녀를 어두운 골목으로 끌고 들어갔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다가 칼에 두 번이나 찔렸다.
온몸이 피로 젖었고, 겁에 질린 그들은 그대로 도망쳤다. 그녀는 피를 흘린 채 골목 밖으로 기어 나와 도움을 청했다. 곧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자궁을 잃을 뻔할 만큼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 사건은 뉴스에까지 보도되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들었어? 백씨 가문 진짜 딸이 윤간당했대. 자궁까지 망가져서 들어냈다던데!"
"세상에, 그럼 이제 애도 못 갖는 거 아니야? 원래도 천박하기 짝이 없어서 가짜 딸이랑 비교도 안 됐는데, 이젠 백씨 가문 골칫덩이가 돼서 시집도 못 가겠네."
"대체 남자 몇 명한테 당한 거야? 나였으면 아마 얼굴도 들지 못했을 거야."
악의적인 소문과 조롱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그 힘든 시기에 윤서진의 곁을 지키고 돌봐준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함께해 온 강태준이었다.
모두가 그녀를 손가락질할 때, 그는 온 세상의 시선을 감수하며 그녀에게 고백했다. 심지어 성대한 프러포즈까지 준비해, 18살이 된 그녀에게 청혼했다.
강태준은 윤서진을 데리고 여행하며 다정하게 곁을 지켜주었다.
어릴 적 그녀가 물에 빠졌을 때 구해 준 것도 강태준이었다. 그날 이후 그녀는 늘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원래부터 그를 짝사랑하고 있던 그녀는, 그의 고백과 따뜻한 배려에 마치 꿈속에 있는 것처럼 빠져들었고, 백씨 가문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진 것 하나 없던 그와 함께하기로 했다.
강태준과 함께 창업하고, 지하실에서 생활하던 시간도 견뎌냈다. 아무리 힘들고 고단해도 두렵지 않았다. 2년 후, 두 사람은 예정대로 혼인 신고를 했고, 결혼 후에도 그는 여전히 다정하고 세심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신혼처럼 애정이 넘쳤고, 함께 임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윤서진은 강태준이 자신의 빛이자 구원이었고, 아름다운 꿈이며, 하늘이 내려준 최고의 보상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강태준이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이 결국 백채영이었다는 사실을 끝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어쩐지 이지현을 처음 봤을 때 어딘가 낯익다고 느꼈다. 딱 백채영의 그 여리고 청초한 모습과 절반쯤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강태준의 고백과 청혼, 그리고 결혼은 모두 백채영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고, 그녀를 위해 헌신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윤서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하… 참 대단한 사랑이네. 그렇다면 나는 대체 뭐였지? 그들의 사랑을 위해 바쳐진 제물이었을까? 아니면 여동생을 지키기 위한 희생양이었던 걸까? 내가 이 아름다운 꿈을 만들어 준 그들에게 감사라도 해야 하는 걸까?'
"누구야?" 사무실 안에서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책상 뒤에 앉아 있던 강태준은 칠흑처럼 어두운 눈빛으로 살짝 열린 문을 바라보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긴 다리를 성큼 내딛으며 온몸에 서늘한 기운을 풍기고 사무실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묵직한 문을 힘 있게 열어젖힌 뒤,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훑었다.
하지만 문밖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가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릴 때, 김현우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방금 누가 왔었어?" 강태준의 눈빛은 사람을 꿰뚫을 듯 날카로웠다.
김현우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지만, 감히 숨길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강 대표님, 방금 사모님께서 오셨습니다. 이지현 씨와 마주치셨는데, 조금 화가 나신 것 같았습니다. 대표님은 사모님을 못 뵈셨습니까?"
"윤서진이 왔다고요?" 백준서도 다가오며 표정이 굳어졌다.
강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속에서 문득 낯선 불안감이 솟구쳤다. 그는 차가운 눈으로 김현우를 쏘아보았다.
"지금 당장 CCTV 확인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