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창고에서 눈을 떴을 때, 제 몸엔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유일한 희망이었던 소방관 남자친구, 남훈우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제 말을 장난으로 치부하며 비웃었습니다.
"또 무슨 드라마 찍냐? 관심받으려고 별짓을 다 하는구나."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는 순식간에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습니다. 그리고 제 마지막 애원에도 전화는 끊겼습니다.
저는 뱃속의 아이와 함께 폭발 속에서 죽었습니다.
유령이 된 저는 그에게 묶여 모든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저를 잊지 못해 괴로워하면서도, 결국 그 여자와 결혼을 준비하는 그를 말입니다.
결혼식 전날, 그는 우연히 그 여자의 통화를 엿듣게 되었습니다. 제 죽음의 진짜 배후와 끔찍한 진실을. 그리고 마침내, 저를 위한 그의 복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제1화
정린지 POV:
눈을 뜨자마자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낡은 창고의 천장은 온통 거미줄투성이였다. 내 손목과 발목은 차가운 쇠사슬에 묶여 있었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어제 퇴근길에 겪었던 일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검은 복면을 쓴 남자. 날카로운 칼날. 그리고 싸늘한 목소리.
"정린지 씨, 오랜만이네."
남자가 다가왔다. 그의 눈빛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는 갈진일이었다. 훈우 씨가 몇 년 전에 잡았던 방화범. 나는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왜 나를 붙잡았는지 깨달았다. 복수. 그는 훈우 씨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를 이용하는 거였다.
"당신... 남훈우랑 무슨 관계야?" 갈진일이 비웃었다. 그의 손에는 망치가 들려 있었다. 녹슨 쇠망치 끝이 내 이마를 스쳤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제발...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네가 뭘 잘못했냐고? 네 남자친구한테 물어봐. 그 자식이 내 인생을 망쳤어." 갈진일의 목소리가 격앙됐다. 그는 내 옷깃을 잡고 흔들었다. "이제 그 자식도 내가 당한 고통을 똑같이 느끼게 해줄 거야."
그는 내 몸에 무언가를 둘렀다. 차가운 금속과 여러 가닥의 전선. 얇은 액정 화면에 숫자가 깜빡였다. 폭탄. 내 몸에 폭탄을 설치한 거였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화면에 나타난 숫자는 30분.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놀랐나? 이제부터 게임을 시작할 거야." 갈진일은 악마처럼 웃었다. 그의 눈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네 남자친구에게 전화해."
"안 돼..." 내 목소리가 떨렸다.
"전화해. 지금 당장." 그의 망치가 내 옆구리를 찍었다. 끔찍한 고통이 전신을 꿰뚫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알았어요... 할게요..." 나는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내 손에 쥐여진 내 휴대폰은 이미 갈진일이 조작해 둔 상태였다. 남훈우의 번호가 화면에 떠 있었다. 나는 망설였다. 훈우 씨에게 전화를 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질 리 없었다. 오히려 그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여보세요." 훈우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갑고 날카로웠다. 익숙한 그의 목소리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 어떤 위로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절망을 안겨주었다.
"훈우 씨... 나야..." 내 목소리는 파리처럼 가늘었다.
"정린지? 지금 몇 시인 줄 알아? 나 지금 일하는 중이야.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 그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마치 내가 아주 귀찮은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훈우 씨... 지금 중요한 일이 생겼어..."
"중요한 일? 네가 말하는 중요한 일이 뭔데? 또 쓸데없는 걸로 나 귀찮게 하는 거 아니지? 저번에 그 고양이 사건처럼?" 훈우 씨는 내 말을 끊고 비꼬듯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는 내가 늘 사소한 일로 그를 귀찮게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눈물이 차올랐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나 지금 납치됐어. 내 몸에..."
"납치? 하. 또 무슨 드라마를 찍고 있니? 네가 이러는 거 한두 번도 아니잖아. 관심을 받으려고 별짓을 다 하는구나. 지난번에는 네 친구가 다쳤다고 거짓말하더니, 이번에는 납치야?" 훈우 씨는 내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내 몸에 설치된 폭탄의 타이머가 9분 43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훈우 씨... 제발... 믿어줘. 나 지금 정말 위험해. 여기 오지 마. 당신도 위험해질 거야..."
그때 갈진일이 내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챘다. "하하하! 네 남자친구는 네 말을 개똥으로 듣는구나? 역시 소방관은 영웅이라서 그런가. 일반인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나 보네." 그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휴대폰은 여전히 훈우 씨와 연결된 상태였다.
"누구야? 정린지, 지금 누구랑 같이 있는 거야? 또 무슨 장난이야?" 훈우 씨의 목소리가 더 날카로워졌다.
"훈우 씨... 아니야... 제발..." 나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갈진일은 내 입을 틀어막았다.
"정린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 지금 장난칠 시간 없어. 네가 또 허튼소리 하면 나 정말 화낼 거야. 네가 또 이러면, 난 네가 정말 싫어질 것 같아." 훈우 씨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리고 네가 그딴 식으로 나를 시험하려 들면, 난 더 이상 널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응? 훈우 오빠,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화났어?" 그때 휴대폰 너머로 백희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달콤하고 애교 섞인 목소리. 내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언제나 훈우 씨 곁에 있는 그녀의 목소리.
"아무것도 아니야, 희란아. 그냥 누가 또 나한테 쓸데없는 장난을 쳐서." 훈우 씨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 그는 희란이에게는 그렇게 다정했다. 나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다정함이었다.
"훈우 씨... 제발... 나...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 나는 갈진일의 손을 뿌리치고 겨우 소리쳤다.
"시끄러워! 이제 그만해! 네가 또 이딴 식으로 내 시간 낭비하면, 그 고양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 너 정말 가만 안 둘 거야!" 훈우 씨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그리고 곧이어, 뚝 하는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나는 멍하니 갈진일을 바라봤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휴대폰을 바닥에 던졌다. "봤지? 네 남자친구는 너한테 관심 없어. 그 자식은 백희란이라는 여자한테만 관심이 있다고. 내가 제대로 알아봤네."
그의 말이 내 심장을 찢어발기는 것 같았다. 나는 이제 혼자였다. 온몸이 묶인 채, 폭탄을 달고, 아무도 없는 낡은 창고에 갇혀 있었다. 폭탄 타이머는 8분 20초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훈우 씨는 단 한 번도 나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백희란뿐이었다. 나는 내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휴대폰에 문자를 보냈다.
'훈우 씨, 다시는 볼 수 없게 해줄게.'
그 문자는 내가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언이 될 터였다. 이젠 정말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