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타오를 때, 심효린은 아직 살아 있었다.
폐 속에 짙은 연기가 가득 들어차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몸 아래에는 끈적하고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었고, 눈앞에는 미친 듯이 타오르는 불길이 보였다. 탁 탁! 불타는 목재 가구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공기 중에는 탄내와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움직일 수 없었던 그녀는 바닥에 누운 채, 일렁이는 불빛 사이로 문 밖에 서 있는 가녀린 그림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빨간 원피스를 입고 불길 밖에 서있는 심이서가 독을 품은 피빛으로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쾌감이 번뜩였다.
"심효린, 이제부터 아빠와 엄마는 내 것이고, 오빠들도 내 것이야. 네 약혼자 역시 내 것이야."
"그러니 편히 죽어."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심효린에겐 불길보다 더 뜨겁게 다가왔다.
심효린은 심이서를 노려봤지만, 목구멍에 가득 찬 피비린내 때문에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증오했다.
뼈 속까지 스며든 증오에 몸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20년 전, 그녀와 심이서는 실수로 부모가 바뀌었다.
한 사람은 온갖 사랑을 받고 자란 심씨 가문의 아가씨가 되었고, 한 사람은 밖에서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며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
심씨 가문에서 그녀를 찾아왔을 때, 그녀는 드디어 고생 끝에 행복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도 부모님과 가족이 생긴 거라고, 돌아갈 곳이 생긴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는 틀렸다.
틀려도 터무니없이 틀렸다.
심씨 가문에 돌아온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가족들의 사랑이 아니라, 계속 되는 함정들이었다.
심이서가 눈물을 흘리면, 부모님은 그녀가 철이 없다고 생각했고, 심이서가 불쌍한 척 하면, 오빠들은 그녀가 악독하다고 확신했다.
심이서가 생각 없이 지어낸 말에, 그녀의 약혼자는 마치 더러운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들은 자초지종을 조사해볼 생각은 아예 없었고 그녀에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심이서가 하는 말이라면 무조건 믿는 것 같았다.
"네가 이서 반만이라도 철이 들었다면, 우리 심씨 가문은 이렇게 망신을 당하지 않았을 거야."
"너처럼 마음이 악독한 사람은 내 여동생이 될 자격이 없어."
"너 따위는 육씨 가문에 들어갈 자격도 없어!"
그 날카로운 말들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폭발하고 말았고, 그녀의 마지막 희망까지 산산조각 냈다.
혈연도 사실 별것 아니었다.
결국 20년 동안 함께 지내며 든 정을 이이지 못했으니까.
불길이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고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얼굴을 덮쳐왔다. 마지막 남은 한 줄기 의식마저 태워버릴 것 같았다.
그때, 문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심씨 부부와 오빠들이 모두 달려온 것이다.
심이서는 즉시 심씨 부인의 품에 안기며 눈물을 흘리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엄마, 죄송해요. 모두 제 잘못이에요. 제가 언니를 막지 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어요."
"네가 왜 사과해?" 심장훈은 이를 악물고 험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쳐서 불을 지른 건 심효린이잖아. 죽어도 싸."
"그래." 심효린의 친 어머니는 심이서를 꼭 끌어안고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가문에 먹칠하는 년은 애초에 심씨 가문에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어."
곁에 선 심효린의 친 아버지는 어두운 표정으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잘됐어. 앞으로 우리 가문에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테니."
심씨 부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심이서의 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마치 흐느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 사람들의 어깨 너머로 불길 속에 있는 심효린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에서 슬픔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오로지 득의양양한 눈빛과 조롱만 가득했다.
"하지만 언니도 결국 심씨 가문의 핏줄이잖아요..." 그녀는 흐느끼며 입을 열었다.
"핏줄이면 어때서?" 심장훈은 차갑게 비웃었다. "앞으로 심씨 가문의 딸은 오직 너 하나야."
그 한마디에 심효린은 모든 희망을 잃어 버렸다.
심효린은 그들을 바라보며 갑자기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목숨을 걸고 얻으려 했던 것이, 그들의 눈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불길이 그녀의 치맛자락을 감싸고 피부를 태웠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오직 증오만 남았을 뿐. 만약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녀는 심씨 가문에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
심효린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가쁜 숨을 몰아 쉬는 그녀는 가슴이 심하게 오르내렸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가득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불길을 막으려 했지만, 손바닥에 닿은 건 차가운 감촉뿐이었다.
불길도, 피도 없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봤다.
아이보리색 벽, 연회색 커튼, 그리고 방 한구석에는 그녀가 심씨 가문에 돌아올 때 가져온 낡은 캐리어가 놓여 있었다.
이곳은 그녀가 심씨 가문에 돌아왔을 때 지냈던 게스트 룸이었다.
하지만 전생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심이서의 계략에 당해 창고로 쫓겨났고, 음습하고 축축한 창고는 하인들이 지내는 방보다도 못했다.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내려 온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수도꼭지를 틀고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뼈 속까지 스며드는 차가운 감촉에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거울에 비친 창백하고 앳된 얼굴, 눈가에는 아직도 두려움이 남아 있었다. 1년 전의 그녀의 모습이 틀림 없었다.
거울에 비친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녀는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때, 문 밖에서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쾅! 쾅! 쾅!
"심효린, 당장 나와!"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분노.
그녀의 둘째 오빠인 심장훈이다.
거울 앞에 선 심효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입 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그녀는 이 장면을 기억했다.
전생, 바로 오늘.
스스로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심이서는 심효린이 밀었다고 울면서 고자질했다.
심장훈은 사람들을 데리고 그녀를 추궁했고, 당황한 그녀는 스스로를 변호하려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창고로 쫓겨났다.
문 밖에서 심장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서를 계단에서 밀어? 살기 싫다 이거지?!"
잠시 가만히 있던 심효린은 손을 들어 흐트러진 머리를 깔끔하게 묶었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눈빛이 점점 차갑게 식어 내렸다.
자신감 없고, 겁 많고, 비굴했던 모습들이 그녀의 몸에서 한 겹 한 겹 벗겨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회귀했다.
하늘이 그녀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으니, 이번 생에는 두번 다시 가족애에 목숨을 걸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 다른 건 전부 필요 없어.
오직 나 자신만을 생각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