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고시안이 그녀를 방까지 데려다 줬다. 하지만 술에 취한 탓에 그녀는 그날 밤의 기억이 전혀 없었다.
'혹시 그날 밤, 우리가 선을 넘은 게 아닐까?'
그 가능성을 떠올린 서단비는 당장이라도 고시안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알아 내고 싶었다.
땅 값이 어마어마한 번화가에 위치해 있는 서당 회관. 서단비가 룸 문을 열자마자 안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자리에 멈춰 섰다.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고시안과 한 여자가 보였고 두 사람의 모습은 친밀하고 애매했다.
고시안의 팔짱을 낀 여자의 얼굴에 케이크 크림이 묻어 있었는데, 따뜻한 노란색 조명까지 머금고 있어 더욱 매혹적으로 보였다.
서단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여자의 이름은 송소율. 고시안과 소꿉친구인 그녀는 4년 전, 진정한 사랑과 꿈을 쫓아 해외로 떠났다.
룸 분위기가 한창 뜨거워졌을 무렵, 누군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시안 형, 이제 소율이도 돌아왔는데, 서단비는 어떻게 할 거야?"
"하! 서단비는 근본도 없는 여자야. 걔가 먼저 형한테 들러 붙지 않았다면, 형은 서단비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거라고."
그 말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고시안에게 향했다.
잘생긴 외모의 남자는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앉아 있었는데, 술잔을 든 그의 손가락은 가늘지만 힘이 넘쳤다.
그는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그냥 친구일 뿐이야. 마음에 둔 적도 없어."
그의 말을 들은 서단비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고시안을 사랑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녀를 그저 염치 없이 고시안에게 달라 붙은 여자로만 보았다.
심지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사귀자고 말했던 남자는 그녀를 그저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서단비는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던 그녀가 실수로 문에 부딪히는 바람에 작은 소리가 났다.
그 즉시, 룸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그녀에게 쏠렸다.
서단비를 발견한 고시안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창백한 얼굴로 문 앞에 선 서단비는 고시안의 시선을 마주했다.
서단비를 등장에도 남자의 깊은 눈동자에는 별다른 파문이 일지 않았다.
그녀는 주먹을 세게 움켜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한 말, 사실이야?"
고시안은 충격 받은 듯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니면?"
주변 사람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마치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발견한 듯 키득거렸다.
"매일 시안 형을 따라다닌다고 해서, 자기가 시안 형의 여자친구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집안을 따진다고..."
"하지만 서단비, 너무 실망하지 마. 그래도 얼굴은 봐 줄만 하잖아. 너와 놀아 보고 싶은 남자는 적지 않을거라고."
주변 사람들의 노골적인 조롱과 비웃음에 서단비는 화가 치민 나머지 몸이 다 떨려왔다.
고시안의 입가에 걸린 나른한 미소를 본 그녀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고 그 고통으로 비로소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서단비는 고시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지난 3년 동안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그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더니 그대로 그의 머리에 들이부었다.
새빨간 와인이 고시안의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잘생긴 얼굴에 걸려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고 분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모습에 주변 사람들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악!" 송소율이 비명을 질렀다. "서단비, 미쳤어?"
서단비가 술잔을 바닥에 내던지자 룸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고시안,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 사이는 끝났어. 너랑 난, 더 이상 아무 관계도 아니야."
비록 그녀도 눈 앞의 상황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으나 끊고 맺는 건 확실해야 한다는 건 알았다.
그 말을 끝으로 서단비는 주저하지 않고 몸을 돌려 룸을 나섰다.
쾅!
큰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고 룸은 순식간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고시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서단비가 어떻게 감히?'
고시안의 어두운 안색을 본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질투에 눈이 돌아간 서단비가 이렇게 무서웠다니..."
"형! 괜찮아, 며칠 지나지 않아 서단비가 고개를 숙인 채, 기어와서 사과할 거야. 내가 장담해. 서단비가 형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맞아. 시안 형, 나중에 서단비가 형을 찾아와 사과하더라도, 절대 마음 약해지면 안돼."
주변 사람들의 말에 고시안의 어두웠던 안색이 조금 누그러졌다.
'맞아. 서단비가 날 그렇게 사랑하는데, 방금 한 말은 분명 홧김에 한 말일 거야.'
송소율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시안 오빠, 옷이 빨갛게 물들었어. 옷 갈아입어야 하지 않아?"
그녀의 손을 밀어 낸 고시안은 마음속에 치밀어 오르는 알 수 없는 초조함을 억누르려 애를 썼다. "괜찮아."
'서단비가 화가 풀리면, 먼저 나에게 연락할 거야.'
문 밖, 서단비는 벽에 기대어 섰다.
진심을 다 바쳐서 사랑했던 그녀다. 하지만 그 감정이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끝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그녀는 갑자기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너무 충격을 받았던 탓에 그녀는 고시안에게 그날 밤의 일에 대해 묻는 것을 까먹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아랫배를 만지던 서단비는 복잡한 심경으로 바닥을 쳐다봤다.
이 아이는, 아무래도 때를 잘못 맞춰 온 것 같았다...
떨리는 발걸음으로 회관을 나온 서단비는 머릿속이 뒤죽박죽인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마당을 지나 현관 문을 열었다.
화려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안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엄마, 이 보약은 내가 친구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해외에서 공수해온 거야. 식감이 부드럽고 피부에도 좋대. 한번 먹어 봐."
"역시, 우리 지민이가 제일 착해. 효녀야, 효녀."
서단비의 친모 장효진과 여동생 서지민이 소파에 앉아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세 오빠는 온화한 표정으로 곁에 앉아 있었다.
서단비는 그들을 흘깃 쳐다 보고는 말 없이 신발을 갈아 신었다.
서단비의 친부 서홍건이 현관에 서 있는 서단비를 발견하고 물었다. "왜 이제야 돌아 온거야?"
장효진과 서지민이 동시에 뒤를 돌아봤고, 분위기는 순식간에 미묘하게 변했다.
장효진은 차가운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큰 오빠와 둘째 오빠는 간단하게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고, 넷째 오빠는 그녀를 흘깃 쳐다보고는 다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이런 냉대에 이미 익숙해진 서단비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일이 생겨 좀 늦어졌어요."
서홍건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곽씨 가문과 서씨 가문 사이에 혼약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우리 두 가문은 혼약을 이행하기로 결정했어. 곽정우의 현재 상황으로 봤을 때, 지민이가 시집가는 건 불가능 하니, 네가 지민이 대신 시집가도록 해."
청천벽력과도 같은 아버지의 말에 서단비는 머리가 멍해졌다.
"곽씨 가문의 실세인 곽정우는 한 달 전에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됐어요. 곽씨 가문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를 모셔왔는데도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다고요. 그런데 지금, 저더러 서지민을 대신해 곽정우에게 시집가라고 하신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