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한지영이 쉰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냈다. 이마를 덮은 두꺼운 앞머리가 검은 테 안경 위로 무겁게 내려앉아, 그녀를 더 위축되고 가련하게 보이게 했다. "다른 방법은 없는 거예요?"
노성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서윤이 몸이 너무 약해. 나 없으면 죽을 수도 있어. 한지영, 넌 다르잖아. 넌 언제나 강했으니까."
그의 말은 지나치게 터무니없었다. '내가 강하다는 이유로… 버려져도 된다는 거야?'
그 황당하고도 날카로운 통증이 순식간에 한지영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문득 아주 오래전, 고아원에 있던 한 소년을 떠올렸다.
햇살이 노성재의 어깨 위로 쏟아졌다. 그는 팔을 벌려 그녀를 등 뒤로 감싸고, 그녀를 괴롭히던 아이들에게 말했다. "얘한테 손대지 마!"
그는 또 말했다. "내가 평생 지켜줄게!"
바로 그때부터, 그녀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한지영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꽉 쥐었고, 관절이 하얗게 질렸다.
"한지영, 서로 난처해지게 만들지 마." 노성재는 고개 숙인 그녀를 내려다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둘 다 알잖아. 이 결혼, 처음부터 서로 필요한 게 있어서 시작된 거였어. 내가 처음에 널 선택한 것도 그냥 조건이 맞아서였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연기를 내뿜었다. "한지영, 난 네가 적어도 체면은 차릴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체면이라니...' 한지영은 헛웃음이 나왔다.
"서윤이는 착한 사람이야." 그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널 상처 주고 싶어 하지 않고, 계속 널 배려하고 있어. 나랑 서윤이, 선 넘은 적 없어."
한지영은 심장이 칼로 도려내는 듯 아팠다. '유부남과 애매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착한 건가?'
"충분한 보상은 해 줄게." 노성재는 담배를 크리스털 재떨이에 비벼 끄며, 한층 더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서명해. 네 자리도 아닌데 계속 붙잡고 있을 필요 없잖아."
솔직히 말해, 한지영은 눈에 띄지 않는 차림을 하고 있을 뿐, 집안일과 일상생활을 챙기는 능력만큼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너무 조용했고, 지나치게 얌전했다. 마치 미지근한 물처럼, 갈증은 해소해 주지만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그걸 마시고 싶지 않았다.
"3일 줄게. 그동안 잘 생각해 봐." 그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하지만 질질 끌지는 마.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필요 없어요." 한지영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펜을 집었다. 펜촉이 종이 위를 스치며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서명했다. 필체는 힘차고 시원하게 뻗어 있었고, 놀라울 만큼 단정하면서도 거침없었다.
노성재는 조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그는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눈치는 있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개인적인 이력을 고려하면, 앞으로 취업이 쉽지 않을 거야. 합의서에 명시된 재산 분할 외에, 개인적으로 100억 원을 더 보상해 줄게. 지금 네가 타고 다니는 포르쉐도 가져."
한지영이 문득 물었다. "마음속에 계속 그 여자가 있었으면서, 그때 왜 저랑 결혼했어요?"
노성재의 시선이 한지영의 눈을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처음으로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서윤이가 기어코 외국으로 가겠다고 해서, 내가 공항으로 쫓아가다가 교통사고가 났어. 내 두 다리가 거의 병신이 될 뻔했어. 할아버지는 나랑 연을 끊겠다며, 사랑에 눈이 멀어 한심하다고 욕을 하셨고. 어머니가 중간에서 애쓰지 않으셨으면 난 벌써 노씨 가문에서 쫓겨났을 거야."
노성재의 말투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했다. "노씨 가문의 권력 중심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결혼이 필요했어.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아내도 필요했고."
그는 한지영을 바라봤다. 그 시선은 지나치게 담담해서, 오히려 잔인하게 느껴졌다. "넌 고아원 때부터 날 알고 있었지. 평범하고 조용한 데다, 나한테 완전히 헌신적이었고. 전과도 있으니까, 다루기 쉽고… 나중에 헤어지기도 쉬울 거라고 생각했고."
"지난 3년간, 넌 아주 잘해줬어." 그는 심지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마치 칭찬이라도 하듯 말했다. "너무 잘해 줘서, 나도 잠깐 잊을 뻔했거든. 이게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집안이랑 한 거래였다는 걸."
한지영은 울지 않았다. 그저 황당하기 짝이 없다고 느꼈다.
지난 몇 년간 조심스럽게 바쳤던 자신의 진심과, 밤낮으로 곁을 지켰던 시간들이 노성재의 눈에는 그저 하나의 거래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는 심지어, 세상 사람들 눈에 비치는 '노 사모님' 역할을 잘 해내기 위해 그녀가 과거의 모든 연결고리를 스스로 끊어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컴퓨터, 메스, 디자인 시안, 레이싱 카…
한때 한지영의 눈을 빛나게 했던 것들을,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만져보지도 못했다.
그녀는 그저 하루하루 그의 곁을 지키며 마사지를 하고 재활을 도왔다.
노성재가 고통스러워하던 모든 밤, 그녀는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2년 전, 그의 다리는 마침내 다시 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었을까?
최서윤이 돌아오자, 한지영이 지난 3년 동안 쏟아부은 모든 것은 순식간에 하얗게 바래 버린 종잇장처럼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저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그래,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무딘 칼로 살을 베듯 질질 끄는 고통보다는, 이렇게 단번에 끝내는 편이 나았다.
바로 그때, 노성재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그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뭐? 서윤이가 유산 기미가 있대?! 지금 바로 갈게!"
전화를 끊자마자 그는 재킷을 집어 들고 한지영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황급히 자리를 떴다.
최서윤에 관한 일이라면 그는 언제나 저랬다. 조급해진 마음에, 눈에는 더 이상 다른 것이 들어오지 않았다. 마치 이 세상에 오직 그 사람의 안위만 남아 있는 것처럼.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의 여운이 텅 빈 거실에 울려 퍼졌다.
한지영은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었다.
갑작스럽게 밀려온 공허함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문밖에서 발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노성재의 어머니 주명숙과 그의 여동생 노수진이 돌아온 것이다.
"쾅!" 문이 거칠게 열리고, 노수진이 명품 쇼핑백 몇 개를 든 채 거만한 표정으로 들어섰다. 그 뒤로는 화려하게 치장하고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명숙이 따라 들어왔다.
"엄마, 이것 좀 보세요. 이번에 새로 산 한정판 가방이에요!" 노수진이 한창 자랑을 늘어놓다가, 곁눈질로 거실 한가운데 서 있는 한지영을 발견했다. 그녀의 얼굴에 노골적인 경멸이 떠올랐다. "어머, 웬 못난이가 여기 서 있어? 재수 없게."
한지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짐을 챙기러 위층으로 올라가려 몸을 돌렸다.
"거기 서!" 노수진이 갑자기 쏜살같이 달려와 길을 막았다.
그녀는 마치 쓰레기를 훑어보듯 한지영을 위아래로 훑었다. "내 화장대에 있던 다이아몬드 목걸이 없어졌는데, 네가 훔친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