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편, 강태준이 내 앞에 서 있다.
날카로운 눈매와 오뚝한 콧날. 그는 처음 만난 날처럼 여전히 멋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결혼기념일에 어울리는 말이 아니었다.
"이혼하자."
충격받지 않았다. 슬프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그를 바라봤다. 심장은 미동도 없이 고요했다.
"이게 우리 38번째 이혼인 거 알아?"
내가 묻자 그의 눈에 무력감이 스쳤다. 그는 내 시선을 피했다.
"희진이가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협박하고 있어."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너랑 이혼 안 하면 안 내려오겠대. 걔 불안장애 있는 거 알잖아…."
나는 그의 말을 잘랐다.
"음, 알지."
5년 내내 알고 있었다. 서른일곱 번의 이혼을 겪으며 지겹도록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얼마나 갈 건데?"
내가 담담하게 묻자 그는 놀란 듯했다.
눈물이나 비명을 예상했던 모양이다.
그는 더 이상 나에게서 원하는 반응을 얻지 못했다.
"희진이 상태 안정되면, 다시 혼인신고할 거야."
그는 약속했다. 내 어깨를 만지려 손을 뻗었다가, 허공에서 멈추고는 거두었다.
"알았지?"
나는 그의 얼굴, 그 눈 속의 갈등을 보았다.
문득 그 모습이 끔찍하게 웃기다고 생각했다.
"알았어."
내가 말했다.
"어차피 우리가 걔한테 빚진 거잖아."
서울가정법원 직원들은 이제 우리 이름을 다 외웠다.
"또 오셨네요?"
김 주무관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그녀는 쳐다보지도 않고 익숙한 서류를 꺼냈다.
우리 이혼의 전문가였다.
"이번에도 합의 이혼 맞으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가 건네는 펜을 받았다.
태준이 내 이름 옆에 서명했다.
펜이 종이에 스치는 소리가 날카롭고 단호했다.
그는 이 일을 서른일곱 번이나 해봤다. 아주 능숙했다.
내 차례가 되자, 펜이 종이 위에서 잠시 멈칫했다.
내 안에서 무언가 오래된 감정의 잔재가 희미하게 깜빡였다.
이게 38번째다.
첫 번째는 숨도 못 쉴 만큼 엉엉 울었다.
두 번째는 그에게 물었다. "왜, 태준아? 왜?"
세 번째, 네 번째… 고통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아홉 번째쯤 되자, 나는 이곳에 와서 김 주무관과 농담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빨리 좀 해주세요. 저희 약속 있거든요."
나는 심호흡을 했다.
내 이름, 서아린, 세 글자를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써 내려갔다.
이번에는 유난히 공을 들였다. 모든 획이 완벽하고, 마지막인 것처럼.
법원 밖으로 나서자 희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옥상이 아니라, 바로 법원 계단 위에서.
가녀리면서도 승리감에 도취된 얼굴로.
그녀는 나를 스쳐 지나가 태준의 품에 와락 안겼다.
"태준아! 네가 날 선택할 줄 알았어! 날 더 사랑하는 거 알고 있었다고!"
태준의 몸이 굳었다. 그는 희진의 어깨너머로 나를 보았다.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죄책감? 미안함?
상관없었다.
그는 희진을 살며시 밀어내려 했다.
"희진아, 그만해."
그녀는 더 세게 매달리며 그를 무시했다.
그의 손에서 이혼 서류를 낚아채 내 얼굴에 트로피처럼 흔들었다.
"이거 봐, 서아린. 이제 이 남자는 내 거야. 원래부터 내 남자였다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을 지켜봤다.
뼛속까지 지쳤다.
"윤희진!"
태준의 목소리가 짜증으로 날카로워졌다.
"그만하라고."
그녀는 즉시 태세를 전환했다.
얼굴을 찡그리며 그의 가슴에 기대 흐느끼기 시작했다.
"미안해, 태준아. 그냥 너무 기뻐서 그랬어. 우리 축하하러 가자! 응?"
그러더니 그녀는 눈물 맺힌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악의가 번뜩였다.
"서아린도 초대하는 건 어때? 우리의 새로운 시작과, 저 여자의 끝을 축하하기 위해서."
태준이 미안함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제발 한 번만 더 장단 좀 맞춰달라고 눈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는 모두 그의 차에 탔다.
희진은 조수석에 앉아 태준에게 기대며, 그의 다리 위에 보란 듯이 손을 올렸다.
나는 뒷좌석에 앉았다. 내 인생의 유령처럼.
나는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허벅지 위를 맴도는 것을 지켜봤다.
그가 핸들을 쥔 손등에 힘줄이 하얗게 돋아나는 것을 봤지만, 그는 그녀를 막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막은 적이 없었다.
침묵. 방관. 타협.
그것이 지난 5년간 희진을 대한 그의 방식이었다.
창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그 광경은 나를 과거로 데려갔다.
5년 전. 우리의 결혼식 날.
나와 태준은 한국대학교의 공식 커플이었다.
그는 촉망받는 경영학과 수재였고, 나는 미래가 기대되는 미대생이었다.
우리는 빠르고 격렬하게 사랑에 빠졌다.
그때 그는 참 다정했다. 붓을 잡는 내 손을 잡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이라고 말해주곤 했다.
희진은 항상 배경처럼 그곳에 있었다. 그의 소꿉친구.
그에게 집착하며 어디든 따라다니던 여자.
"그냥 친동생 같은 애야."
그는 내 걱정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말했다.
"걱정 마, 아린아. 내가 사랑하는 건 너야."
나는 그를 믿었다.
결혼식 날, 내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서 있을 때, 그의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렸다.
희진이었다.
"받지 마, 태준아."
불안감이 배 속에서 똬리를 트는 것을 느끼며 내가 말했다.
"오늘은 안 돼. 오늘은 우리를 위한 날이야."
그는 미소 지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꿨다.
몇 시간 동안은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
나중에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우리가 서약을 읊조리는 동안, 술에 취해 이성을 잃은 희진이 차를 몰다 대형 사고를 냈다.
그녀는 병원으로 실려 갔다. 몸은 망가졌다.
의사들은 그녀가 평생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다고 말했다.
죄책감이 태준을 짓눌렀다.
그는 그녀의 전화를 무시했기 때문에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
그날부터 빚이 생겼다.
그가, 그리고 그로 인해 나까지 함께 갚아야 할 빚.
희진의 육체적 상처는 아물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심각한 불안장애와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연약함을 무기처럼 휘두르기 시작했다.
태준과 내가 행복해 보일 때마다, 그녀는 발작을 일으켰다. 공황 발작. 자살 협박.
그리고 매번, 태준은 굴복했다.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는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장 큰 요구는 항상 같았다.
"서아린이랑 이혼해."
그래서 우리는 이혼했다.
첫 번째 이혼 때, 그는 우는 나를 안아주며 이건 그냥 쇼일 뿐이라고 약속했다.
몇 주 후, 희진이 "안정"을 되찾으면, 그녀는 울며 사과하러 찾아왔다.
태준은 그녀를 용서했다. 그리고 우리는 재혼했다.
그러고 나면 그 굴레가 다시 반복되었다.
그리고 또 반복되었다.
서른여덟 번.
나는 고통에서 무감각으로, 그리고 영혼 깊숙이 자리 잡은 뼛속까지 시린 피로감으로 변해갔다.
내 붓은 먼지가 쌓여갔다. 내 세상의 찬란한 색들은 잿빛으로 바래버렸다.
차 안에서, 나는 운전하는 태준의 옆모습을 본다.
그는 여전히 잘생겼고, 여전히 내가 사랑에 빠졌던 남자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여자가 우리 삶을 망치도록 내버려 둔 낯선 남자이기도 하다.
그는 방금 그녀가 자신을 만지도록 내버려 뒀다.
내 자리에 앉도록 내버려 뒀다.
내 이혼을 축하하러 우리를 데려가고 있다.
차갑고 선명한 결심이 내 심장에 자리 잡았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39번째 재혼은 없을 것이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오빠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아빠 집에 계셔?]
거의 즉시 답장이 왔다.
[ㅇㅇ. 왜?]
[나 한 시간 뒤에 갈게. 할 얘기 있어.]
그리고 부모님께 문자를 보냈다.
[나 그 사람이랑 헤어질 거야. 이번엔 진짜로. 멀리 떠나고 싶어. 같이 가줄 수 있어?]
엄마의 답장은 걱정스러운 이모티콘으로 가득했다.
아빠의 답장은 간단하고 직설적이었다.
[우린 언제나 네 곁에 있다.]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렀다.
나는 재빨리 닦아냈다.
이 남자를 위해 흘린 눈물은 이미 충분했다. 더 이상 울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청담동의 고급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희진은 아이처럼 태준의 팔에 매달려 그의 옆자리에 앉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가 팔을 빼려 하자 그녀는 훌쩍이기 시작했다.
"태준아, 이제 내가 싫어진 거지? 내가 겪은 모든 일들 때문에…."
그는 패배감에 한숨을 쉬며 그녀를 내버려 뒀다.
그는 그녀의 스테이크를 잘라주고, 와인을 따라주었다.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이 그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그들은 깊이 사랑하는 연인처럼 보였다.
나는 투명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불필요한 부품.
내 옆자리에 놓여 있던 가방이 미끄러지며 작은 스케치북이 떨어졌다.
몇 달 동안 쓰지 않은 것이었다.
희진이 그것을 봤다. 그녀의 얼굴이 변했다.
"그게 뭐야?"
그녀가 쏘아붙였다.
"자랑하는 거야? 네가 예전에 어땠는지 그 사람한테 상기시키려는 거야?"
그녀는 눈을 번뜩이며 테이블 너머로 몸을 기울였다.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는 자기 앞에 놓인 뜨거운 수프 그릇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내 얼굴을 향해 그대로 던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