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은둔형 재벌 3세, 강태준의 말상대가 되어주기 위해 고용된 화가였다.
나는 내가 구원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 상처 입은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다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의 은밀한 순간들을 몰래 녹화하고 있었다.
딥페이크 기술로 내 얼굴에 의붓여동생 한채리의 얼굴을 씌우기 위해서.
나는 그의 연인이 아니었다.
그의 집착을 위한 대역, 바디 더블이었을 뿐이다.
한채리가 나에게 폭행 누명을 씌웠을 때, 강태준은 그녀의 말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경호원들이 나를 구타하는 것을 지켜보기까지 했다.
나중에는 조폭을 보내 내 오른손을 박살 내고, 화가로서의 내 인생을 끝장냈다.
결혼을 앞둔 한채리의 평판을 지키기 위해, 그는 나를 구치소에 처넣었다.
“넌 그냥 장난감이었어.”
그는 차갑게 말했다.
“이제 질렸어.”
그는 내 몸과 경력, 그리고 심장을 파괴했다.
자신을 속이고 있는 한 여자를 위해.
하지만 그 차가운 감방 안에서, 나를 내쫓았던 의붓아버지에게서 제안이 왔다.
내 어머니의 막대한 신탁 자금을 대가로, 장애를 가진 IT 재벌 후계자 유건우와 결혼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거래를 받아들였다.
구치소를 걸어 나와, 그 도시를 떠나, 낯선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나를 부서뜨린 남자로부터 마침내 벗어나기로 선택한 것이다.
제1화
그의 체온이 사라진 시트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나는 강태준이 침대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날카로운 선과 근육으로 다져진 그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일말의 미련도 남기지 않는 무심한 우아함으로, 절제된 동작으로 움직였다.
잠시 동안, 나는 내 피부에 닿았던 그의 뜨거운 체온, 그의 무게감, 내 목덜미를 스치던 까끌까끌한 수염의 감촉을 떠올렸다.
그의 삭막한 펜트하우스에서 느낄 수 있는 찰나의 온기였다.
그는 창가에 멈춰 섰다.
서울의 야경이 그의 실루엣을 거칠게 그려냈다.
그는 풍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매번 그랬다.
마치 내 앞의 남자는 껍데기일 뿐이라는 듯, 아주 짧고 거의 감지할 수 없는 단절이 일어났다.
나는 팔꿈치로 몸을 일으켰다.
비단 시트가 허리춤에서 흘러내렸다.
그 움직임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잿빛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그 안에는 온기라고는 없었다.
차가운 평가만이 존재할 뿐.
그가 다시 침대로 걸어왔다.
그의 손이 내 엉덩이에 닿았다.
애무가 아닌, 나를 고정시키는 닻과 같았다.
그는 익숙하고 지배적인 무게로 나를 매트리스에 다시 눕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그가 이끄는 대로 몸을 맡겼다.
내 몸은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우리 사이의 깊은 간극을 메우기 위해 무엇이든 느끼고 싶었다.
나는 그의 목을 감싸 안고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표면적인 것보다 더 깊은 키스를 갈구하며.
그는 허락했다.
그의 입술은 열정 없이, 숙련된 기술로만 내 입술 위를 움직였다.
모든 것이 끝나자, 그는 즉시 몸을 뗐다.
그가 떠난 자리는 다시 차가워졌다.
그는 일어나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은 효율적이고 정확했다.
그의 눈 속의 냉정함과 어울리는 어둡고 값비싼 시계를 찼다.
행위 후의 여운도, 함께하는 침묵도 없었다.
그가 갑옷을 다시 입는 동안 조용한 옷 스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나는 일어나 바닥에 널브러진 내 옷을 기계적으로 챙겨 입었다.
내 행동은 너무나 여러 번 반복해 온 로봇 같았다.
강태준이 책장으로 걸어갔다.
그의 손가락이 가죽 장정의 고전들 위를 스치다가,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패널에서 멈췄다.
부드러운 ‘딸깍’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카메라를 끄는 소리였다.
그는 숨겨진 렌즈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가 처음 물었던 날이 기억났다.
요청이 아니라, 조건이었다.
내 속은 수치심과 혼란으로 뒤틀렸다.
그는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기억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했다.
나는 절박했다.
그의 어머니에게 산더미 같은 빚을 지고 있었고, 이것이 빚을 갚을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나는 ‘예’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이 기억났다.
강 회장 사모님이 주선한 자리였다.
그는 이 유리 탑에 숨어 지내는 유령, 은둔자였다.
내 일은 간단했다.
그를 세상 밖으로 끌어내는 것.
그의 말상대, 그의 뮤즈, 그가 다시 인간성을 느끼기 위해 필요한 무엇이든 되어주는 것.
나는 화가였고, 그의 어머니는 나를 망가진 아들을 고치는 도구로 여겼다.
한동안은 내가 성공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상처 입고, 신비로웠다.
내가 필사적으로 풀고 싶은 퍼즐이었다.
나는 그의 초상을 그리고, 스케치하며, 그의 얼굴 윤곽과 눈 속의 그늘을 익혔다.
내가 구원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 남자에게 빠져들었다.
끌림은 부정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우리는 침대로 쓰러져 들어갔다.
나의 희망과 그의 침묵 속 절박한 욕구가 충돌했다.
진짜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 관계에는 두 가지 규칙이 따랐다.
첫째, 그의 과거에 대해 절대 묻지 말 것.
둘째, 그는 모든 것을 녹화한다.
나는 옷을 다 입고 그에게 다가갔다.
숨겨진 슬롯에서 작은 메모리 카드를 꺼냈다.
“여기요.”
내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나는 그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그는 카드를 흘끗 보고는 다시 나를 쳐다봤다.
“책상 위에 둬.”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나와 함께 영상을 본 적도 없었다.
그는 카드를 가져가 서재로 사라져 몇 시간이고 나오지 않았다.
이제 나는 그 이유를 안다.
그 발견의 기억은 내 마음에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몇 주 전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노크 없이 그의 서재에 커피를 들고 들어갔다.
그는 없었지만, 그의 노트북이 열려 있었다.
화면에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나였다.
내 몸, 내 움직임, 그를 향해 몸을 아치형으로 휘는 내 등의 곡선.
하지만 얼굴은 내 것이 아니었다.
한채리였다.
내 의붓여동생.
그녀의 얼굴이 내 몸 위에 완벽하게 겹쳐져, 그의 이름을 신음하고 있었다.
그 영상은 수십 개 중 하나였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의 목록 전부가, 그가 다른 여자를 중심으로 구축한 환상 속에서 변질되고 뒤틀려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집착했다.
나는 그저 바디 더블, 멀리서 보면 그녀와 충분히 닮았기 때문에 편리한 대역이었을 뿐이다.
같은 검은 머리, 같은 가느다란 몸매.
그의 기술이 나머지를 처리하기에 충분히 가까웠다.
그가 속삭였던 모든 다정한 말들, 내가 돌파구라고 생각했던 모든 순간들은, 그녀를 위한 것이었다.
그는 나를 보고 있었지만, 한채리를 보고 있었다.
한때 그를 위해 미친 듯이 뛰었던 내 심장은, 가슴 속에서 죽은 듯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가 키워온 사랑은 재가 되어버렸다.
“서아야.”
강태준의 목소리가 내 생각을 가르고, 나를 차가운 펜트하우스로 다시 끌어냈다.
그는 셔츠 단추를 잠그고 있었다.
“물 한 잔 가져와.”
요청이 아니었다.
나는 뻣뻣한 움직임으로 부엌으로 걸어갔다.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손가락은 감각이 없었다.
그는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잔을 받아 단숨에 비웠다.
“제네바로 출장 가. 일주일 정도 걸릴 거야.”
그는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며 통보했다.
“알겠어요.”
내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내면 깊은 곳에서는 떨림이 있었다.
그가 돌아섰다.
그의 눈이 살짝 좁혀졌다.
“너… 좀 달라 보이는데.”
“그냥 피곤해서요.”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거짓말했다.
“출장 잘 다녀오세요. ‘성과’가 있기를 바랄게요.”
그는 잠시 더 내 얼굴을 살폈다.
그의 눈에 혼란의 빛이 스쳤다.
그는 내 안의 변화를 보지 못했다.
애초에 나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밖으로 걸어 나갔다.
자물쇠가 ‘철컥’하고 잠기며, 나를 침묵 속에 가뒀다.
나는 아직 내 손에 들려 있는 메모리 카드를 내려다봤다.
작고 공허한 웃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내 임무는 끝났다.
강 회장 사모님은 아들을 세상으로 다시 데려오길 원했다.
나는 해냈다.
단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 뿐.
내 심장은 마침내, 완전히 부서졌다.
그리고 그 부서짐 속에서, 나는 한 조각의 자유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