끔찍한 평온이 나를 덮쳤다.
입안에 피 맛이 가득 고였다. 그가 전혀 몰랐던 내 병의 증상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그의 잔인하고 추악한 비웃음이 들려왔다.
"그렇게 괴로우면 그 옥상에서 뛰어내리든가. 너한테 딱 어울리는 끝이겠네."
"알았어."
나는 속삭였다.
그리고 건물 가장자리에서 허공으로 발을 내디뎠다.
제1화
골수 채취용 바늘은 두껍고 차가웠다.
서연우는 소독된 병원 침대에 엎드려 등을 드러냈다.
바늘을 쳐다보진 않았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다가올 고통이 느껴졌다.
의사가 다시 한번 시술 과정을 설명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현실을 바꾸진 못했다.
아플 것이다. 아주 많이.
강태준은 창가에 서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키가 컸고, 내 차보다 비싼 맞춤 정장을 입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왕국을 내려다보는 왕처럼 도시를 응시했다.
그의 약혼녀 한세라는 사고를 당했다.
살기 위해 이식이 필요했지만, 완벽한 피부에 흉터가 남는다는 생각은 견딜 수 없어 했다.
그래서 그는 연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개인 비서.
돈이라면 뭐든지 할 거라고 믿는 여자에게.
바늘이 피부를 뚫고 들어왔다.
연우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날카롭고 비릿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절대 소리를 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에게 만족감을 줄 수는 없었다.
바늘이 엉덩이뼈 속 골수를 찾아 더 깊이 파고들자,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뻣뻣하게 굳었다.
고통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깊고 묵직한 통증이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그것이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것이었다.
영원처럼 느껴지던 시간이 지나고, 시술이 끝났다.
의사는 무심하고 기계적인 손길로 상처에 붕대를 감아주었다.
연우는 천천히, 고통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등이 둔하고 지속적인 고통으로 욱신거렸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옷을 입었다.
강태준이 마침내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조각처럼 잘생겼지만, 한때 그녀를 향했던 따스함은 온데간데없이 텅 비어 있었다.
"끝났나?"
그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연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이 모든 게 끝나기만을 바랐다.
떠나고 싶었다.
"우리 계약은…"
그녀가 겨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끝난 거죠?"
그녀가 말한 것은 자신을 그에게 옭아맨 뒤틀린 계약, 바로 이 '일'이었다.
그의 곁에서 매일같이 고문을 당하는 이 지긋지긋한 일.
강태준은 오해했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수표책을 꺼냈다.
숫자를 휘갈겨 쓴 뒤, 수표를 찢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여기."
그가 입꼬리를 비틀며 비웃었다.
"네 몸값. 넌 예나 지금이나 네 몸뚱어리 팔아서 돈 버는 건 참 잘해, 서연우."
그 말은 바늘보다 더 아프게 그녀를 찔렀다.
그녀는 수표를 보았다가, 다시 그의 얼굴을 보았다.
어릴 적부터 사랑했던 얼굴.
이제는 경멸 외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얼굴.
수표를 향해 뻗은 손이 떨렸다.
손가락이 그의 손에 스치자, 그는 마치 불에 덴 것처럼 움찔하며 손을 뺐다.
그녀는 수표를 받았다.
돈이 필요했다. 절실하게.
그녀는 수표를 조심스럽게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가방을 들고, 그녀는 한마디 말도 없이 방을 나섰다.
병원 문이 등 뒤에서 닫히자, 도시의 공기가 피부에 차갑게 와닿았다.
그녀는 벽에 기댔다.
등의 통증과 심장의 통증이 하나가 되어 견딜 수 없는 무게로 짓눌렀다.
언제나 이렇지는 않았다.
돈도, 증오도 없던 시절이 있었다.
강태준이 냉혈한 재벌이 아니라, 그냥 태준이, 나의 태준이었던 시절.
그는 세상에 버려진 조용하고 총명한 소년으로 우리 가족에게 왔다.
연우의 부모님은 그를 친아들처럼 받아들이고 사랑했다.
그는 작고 행복한 우리 집의 별이었다.
연우와 그는 남매처럼 자랐지만, 둘의 유대감은 그보다 깊었다.
뒷마당에 함께 심은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 아래서 피어난, 비밀스럽고 말하지 못한 사랑이었다.
그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위대한 운명을 타고난 황금 소년이었다.
연우는 그의 그림자이자, 그의 비밀을 들어주는 친구였고, 그의 미소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둘만 있을 때, 그는 그저 그녀의 가족을,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소년일 뿐이었다.
그들의 완벽한 세계는 그의 친아버지가 나타난 날 산산조각 났다.
강진혁.
IT 업계에서 공포의 대상인 이름.
사람을 장기말로 여기는 무자비한 거물.
그는 자신의 뛰어난 아들을 되찾고 싶었고, 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이었다.
그는 연우의 가족을 파괴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부모님은 의문스러운 이유로 직장에서 해고당했다.
선량하고 정직한 아버지는 저지르지도 않은 폭행죄 누명을 썼다.
어머니는 뺑소니 사고의 피해자가 되어 평생 고통 속에 살아야 하는 장애를 얻었다.
강진혁은 연우에게 불가능한 선택지를 내밀었다.
50억 원.
"이 돈을 받아."
그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내 아들에게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다고 말해. 그놈과의 미래보다 이 돈을 택하겠다고. 아니면 네 가족이 완전히 무너지는 걸 지켜보든가."
가족을 구하기 위해, 태준을 그의 아버지라는 독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그녀는 선택을 했다.
그녀는 목숨보다 사랑하는 소년, 강태준 앞에 섰다.
그리고 평생 내뱉은 말 중 가장 잔인한 말을 던졌다.
"나 이 돈 받을래, 태준아. 50억이야. 네가 나한테 이것보다 더 가치 있는 걸 줄 수 있기나 해?"
그의 눈에 비친 날것 그대로의, 산산조각 난 상처는 그녀가 평생 안고 가야 할 상처가 되었다.
그는 그녀의 말을 믿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자신보다 돈을 선택한 소녀에 대한 불타는 복수심을 가슴에 품은 채.
7년이 흘렀다.
강태준은 더 이상 상처받은 소년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재벌, 자신의 아버지보다 더 차갑고 무자비한 남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복수를 위해 왔다.
그는 그녀를 개인 비서로 삼았다.
그의 새로운 삶, 새로운 약혼녀, 그리고 그의 끝없고 창의적인 잔인함을 맨 앞줄에서 지켜보게 했다.
매일이 새로운 고문이었고, 그녀의 '배신'을 상기시키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연우는 주머니에서 수표를 꺼내 숫자를 보았다.
엄청난 액수였다.
부모님의 불어나는 병원비를 감당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의 병원비도.
강태준이 모르는 것,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서연우는 죽어가고 있었다.
말기 위암.
의사들은 몇 주, 운이 좋으면 한 달이라고 했다.
그 돈은 그녀에게 없는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부모님을 부양할 수 있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그들을 편안하게 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작고 조용한 공원으로 걸어가 벤치에 앉았다.
수표를 다시 한번 보고는 휴대폰을 꺼냈다.
메시지 창을 열었다.
강태준과의 대화창이 상단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프로필 사진은 차가운 회사 로고였다.
그녀의 사진은 여전히 부모님 집 뒷마당의 플라타너스 나무였다.
대화 기록은 일방적이었다.
써놓고 보내지 못한 메시지들로 가득했다.
'태준아, 오늘 비 온다. 우리 예전에 우산 하나 같이 썼던 거 기억나?'
'플라타너스 나무가 엄청 커졌어. 곧 생일인데.'
'오늘 뉴스에서 봤어. 피곤해 보이더라.'
7년간의 침묵과 증오의 심연을 메워보려는 작고 초라한 시도들이었다.
그녀는 서툰 손가락으로 새로운 메시지를 입력했다.
'태준아, 미안해.'
흐려지는 시야로 그 글자들을 응시했다.
무엇이 미안한 걸까?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가족을 구한 것?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것?
그녀는 메시지를 지웠다.
무의미했다.
어차피 그는 보지 못할 것이다.
몇 년 전에 이미 그녀를 차단했으니까.
등의 통증은 오늘 하루를 상기시키는 끊임없는 고동이었다.
영혼의 상처가 육체적으로 발현된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증오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한 선택이었으니까.
하지만 가끔, 고통 때문에 잠 못 이루는 깊은 밤이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허락했다.
그는 한 번이라도 나를 떠올렸을까?
진짜 나를?
그와 함께 나무를 오르고 별빛 아래서 꿈을 나누던 소녀를?
아니면 나는 그저 그가 마음속에 만들어낸, 돈에 굶주린 괴물로 대체된 유령일 뿐일까?
그녀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피로의 파도가 밀려왔다.
병마는 조용한 도둑처럼 그녀의 힘과 숨결, 그리고 삶을 훔쳐가고 있었다.
이미 변호사와 연락해 사후의 모든 것을 정리해 두었다.
부모님을 위한 신탁.
간소하고 조용한 장례식.
기묘한 평온함이 느껴졌다.
해방감.
싸움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강태준을 생각했다.
'사랑해.'
그 생각은 더 이상 믿지 않는 신에게 보내는 조용한 기도였다.
'언제나 그랬어.'
'너를 이 증오 속에 남겨두고 떠나야 해서 미안해.'
'이제 우리 빚은 없어, 태준아. 나 더 이상 너한테 빚진 거 없어.'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쑤셨다.
등의 새로운 상처는 심장의 오래된 상처처럼 생생하고 쓰라렸다.
이제 그의 냉정함에 무감각해졌다.
익숙한 고통이었고, 일상의 일부였다.
그녀는 어둡고 차가운 바다로 서서히 가라앉는 배였다.
그리고 그것을 막을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가라앉으면서도, 작고 완고한 일부는 완전히 부서지기를 거부했다.
그것은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의 소년을 여전히 사랑하는 부분이었다.
숨 막힐 정도로 깊은 증오와 뒤엉킨 사랑.
사랑과 증오.
그것이 그녀에게 남은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