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시국립병원 VIP 병실.
강은서는 병실 침대에 기대어 태블릿에서 재생되는 영상을 바라보며, 눈빛에 냉소가 스쳤다.
그녀가 고열로 입원해 있는 동안, 약혼자 지상철은 호텔에서 다른 여자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영상 속 어두운 호텔 복도의 조명 속에서도, 강은서는 지상철의 품에 안긴 여자가 자신의 이복 여동생 강은영임을 한눈에 알아챘다.
강은서는 태블릿을 닫으며 냉담한 시선으로 눈앞의 사람을 응시했다.
"내가 문신을 하지 않겠다면 어쩌실 건가요?"
지상철의 비서 서강혁은 강은서의 반응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그녀의 입장이었어도 같은 반응을 보였을 거라 생각했다.
호텔에서 다른 여자와 밤을 보낸 남자가 약혼녀에게 수습해 주길 바라다니...누구라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지씨 그룹이 중요한 시기를 맞은 이 시점에, 후계자 지상철의 사생활 논란 영상이 유출되자마자 회사 주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사태를 무마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정식 약혼자인 강은서를 내세워 해명하는 것이다.
영상 속 강은영의 얼굴은 비춰지지 않았지만, 허리 라인에 새겨진 지상철 이니셜 문신만은 선명하게 드러났다.
서강혁이 병원에 온 목적은 강은서에게 강은영과 똑같은 문신을 새기라는 지상철의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면, 영상에 대한 논란은 순식간에 가라앉을 것이다.
서강혁은 동정 어린 눈빛으로 강은서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 아가씨, 이건 지 대표님의 뜻입니다. 협조해 주시지 않으시면 다음 주 노부인 치료가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서강혁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은서는 이미 그의 뜻을 읽어냈다.
정확히는 지상철의 의도를 파악한 것이다.
그는 배씨 노부인을 앞세워 그녀를 압박하고 있었다.
배씨 노부인은 주기적인 치료가 필요했고, A시에서는 천재 의사 오민수만이 그 치료를 할 수 있었다.
강은서는 지상철이 어떻게 오민수를 설득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배씨 노부인을 앞세운 그의 위협 앞에서, 그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몇 분 뒤, 강은서는 침대 위에 엎드렸다.
곁에 서 있던 타투이스트는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강은서의 특수 체질 때문에 타투이스트가 준비한 마취제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문신이 끝났을 때, 강은서의 줄무늬 입원복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원래 핏기 없던 얼굴은 종이처럼 창백해져 있었다.
"강 아가씨. 실례하겠습니다."
서강혁은 그녀에게 다가가 허리에 새겨진 문신을 재빠르게 촬영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 사진을 지상철에게 전송했다.
지상철의 답변을 받은 후에야 서강혁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타투이스트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타투이스트는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
"강 아가씨, 푹 쉬세요. 저녁에 기사가 모시러 올 겁니다."
말을 끝내자마자 서강혁 역시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강은서는 비로소 눈을 떴다.
허리 뒤로 찌릿한 통증이 퍼지는 가운데, 강은서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화장실로 들어섰다.
거울에 비친, 강은영과 똑같은 허리 문신을 바라보던 강은서의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고, 가슴 한가운데 무거운 돌이 내려앉은 듯 숨이 탁 막혔다.
저녁 7시가 되자 강은서는 서강혁을 따라 지씨 그룹 기자회견장으로 향했다.
지상철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잘생긴 얼굴과 당당한 자세, 핏팅된 블랙 정장이 어우러져 타고난 귀족의 품위를 풍겼다.
지상철이 입은 정장을 본 순간, 강은서의 눈동자 깊이 어두운 빛이 스치듯 지나갔다.
그 정장은 2년 전, 그녀가 한 달 내내 밤낮 없이 정성을 쏟아 디자인부터 바느질까지 직접 완성한 것이었다.
그녀는 지상철이 이 옷을 받던 그 순간, 기뻐하던 표정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겨우 2년이 흘렀을 뿐인데, 옷은 그대로였지만, 지상철은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강은서 씨, 지 대표님의 약혼녀로서 어제 밤 지 대표님이 문신한 여성과 호텔에 출입한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실 겁니까? 모르는 척하실 건가요, 아니면..."
그 기자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눈앞의 광경에 순간 얼어붙었다.
지상철은 강은서를 감싸 안는 동시에, 의도적으로 그녀 상의의 밑단을 살짝 들어올렸다.
순간, 영상 속과 동일한 그 문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치 않는 접촉에 강은서는 역겨움을 느꼈다.
더욱이 고개를 든 순간, 그의 목에 선명한 키스 자국마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역겨움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입술을 꽉 깨물며 감정을 억눌렀다.
"은서야, 어젯밤 일에 대해 네가 기자 분들께 설명해 줄래?"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조소로 가득 차 있었다.
강은서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했으나, 할머니를 생각하며 참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모두 오해입니다. 어제 지 대표님과 함께한 사람은 바로 저였어요. 인터넷에 퍼진 그 영상 속 사람도 저고요."
"역시나 오해였군요! 보아 하니 강은서 씨와 지 대표님의 관계는 매우 안정적이네요. 조만간 기쁜 소식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기자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상철은 강은서를 꼭 껴안았다.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그 온기 속엔 진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 후 지상철의 핸드폰이 울렸고 화면에 강은영의 이름이 떴다.
그는 재빨리 강은서를 밀쳐냈다.
다행히 기자들이 모두 떠난 뒤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또 다시 논란이 터졌을 것이다.
강은서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강은영의 애교스러운 투정과 지상철이 다정하게 위로해주는 목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서강혁이 강은서를 집까지 태워주려 했으나 그녀는 거절하고, 홀로 행사장을 떠나 시내 중심의 아파트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강은서는 창가 소파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창밖의 도시 불빛을 바라보던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세 번 울리고 연결되었지만, 수화기 너머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귓가에 닿는 낮은 숨소리만 아니었다면, 강은서는 전화가 끊긴 줄 알았을 것이다.
강은서는 침묵을 깨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약속, 지금도 유효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