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고청아의 간기증 기회를 이슬이의 엄마에게 주고 싶은 거 확실해?" 주치의가 물었다.
"그렇게 할 거야. 이슬이가 엄마를 잃는 걸 지켜볼 수 없어. 그녀는 어쨌든 내게 딸을 낳아 줬어." 노용성이 대답했다.
"그런데 형, 고청아가 간이식을 빠른 시일내 받지 못한다면 생명이 위태로워." 주치의는 충분히 신중하게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녀에게 아직 3개월시간이 남아 있잖아. 좀 더 기다릴 수 있어. 곧 다른 공여자가 생길지도 모르잖아..." 노용성은 덤덤히 대답했다.
그 둘의 말은 고청아에게 청천벽력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청아는 순간적으로 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오직 '그녀는 어쨌든 내게 딸을 낳아 줬어.'라는 그 한 마디만이 계속해서 맴돌 뿐이었다.
노용성이 그녀에게 빈틈없이 잘해준다는 사실은 친근에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3년 동안 그녀가 입원한 횟수는 셀 수 없을 정도였고, 그럴때마다 노용성은 잠도 자지 않으면서 곁에서 세심히 돌보았다.
그녀가 병원의 음식을 싫어하자 그는 하루에 여섯 번씩 병원과 집 사이를 오가며 직접 한 요리를 그녀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녀가 죽음과 번번이 스치던 순간, 그는 항상 수술실 밖에서 기도하였다. 심지어 사원 문 앞에서 밤새 머리를 조아리며 그녀의 건강을 빌기 위한 평안부(平安符) 하나를 받으려 애썼다.
그렇게 자신의 생명처럼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던 남자가, 어떻게 그녀를 배신할 수 있었을까?
발기척에 고청아는 잠겼던 사색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분명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스스로 확신했다.
10년 간 이어온 사랑, 그녀가 죽음을 앞둔 지금도 그는 포기라는 단어조차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런 그가 어찌 그녀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그녀가 이어폰을 빼려고 손을 뻗는 순간 또 다른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여보, 오늘 우리 딸 생일이에요. 언제 와요?"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물었다.
고청아의 세상은 다시 산산조각이 났다.
"곧 출발해." 노용성이 정겨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빠, 나 저번에 쇼핑몰에서 본 그 바비 인형 갖고 싶어!" 여자애의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아빠가 이미 선물 사놨지. 조금만 기다려~" 노용성이 말했다.
고청아가 이어폰을 뺀 순간 눈물이 주체 못하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헛된 희망을 품고 있던 그녀는 이제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노용성, 그가 정말로 밖에 또 다른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고? 그녀의 존재는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노용성이 18살 되던 해, 부모를 여의고 의지할 곳 없어 고청아의 부모님이 그를 불쌍하게 여겨 고씨 집안에 발을 들였다. 고청아는 노용성을 보자마자, 그 청청한 눈동자에 가득한 우수와 과묵한 성격에 순간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예상대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대학 시절부터 졸업 후 결혼까지, 노용성은 그녀를 공주처럼 아꼈다. 고청아의 부모님께도 줄곧 '평생 그녀를 잘 해주겠다.' 면서 맹세했다.
오랜 병상에 누운 아내의 변덕은 일상다반사였지만, 노용성은 그저 다정히 손을 잡아줄 뿐 한마디 불평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수많은 밤, 그녀가 아파 잠에서 깰 때면 그는 항상 곁에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꽉 안고 애원했다. "조금만 더 버텨줘! 제발 나 혼자 두고 가지 말아줘!" 그렇게 고청아는 위독한 순간마다 노용성의 위로때문에 다시 버텨낼 수 있었다.
그녀는 간 이식을 기다리며 마침내 희망을 볼 줄 알았지만 정작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더 끔찍한 지옥이었다는 걸 몰랐다.
"자기야, 왜 울어?무슨 일이야?" 노용성이 들어오면서 울고 있는 고청아에게 물었다.
그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왜? 수술이 무서워? 괜찮아, 걱정마. 방금 남준이랑 통화했어. 기증자가 돌아가시면 일정을 정할 거야. 다 좋아질 거야."
고청아는 방금 일어난 일이 마치 꿈만 같았다. 눈앞에 이 남자는 예전처럼 다정하고 세심했다. 우연히 전화를 듣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가 자신을 얼마나 깊이 속였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자, 이제 눈 좀 붙히고 있어.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금방 갔다 올게." 노용성이 말했다.
고청아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노용성의 말을 의심한 적이 없었지만, 오늘 정말 회사에 가는 게 맞는 걸까 의심들었다.
"우유 한 잔 데워줄래?"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노용성은 애틋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문밖으로 나갔다. 고청아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휴대폰을 열었다. 비밀번호는 여전히 오랜 시간이 흘러도 바뀌지 않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그녀는 그의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 2분 전에 "매니저"와 통화한 내용이 표시되었다. 그녀는 그것이 매니저의 번호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고청아의 가슴에 무언가에 콕콕 찔리는 아픔이 찾아왔다. 그토록 서툰 거짓말인데도,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으니.
"자기야, 우유왔어. 지금 뜨거워. 좀 있다가 마셔. 시간이 급해서, 나 갔다 올게." 노용성이 말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하고는 서둘러 나갔다.
고청아는 냉소를 지었다. 참 성급하기도 하지. 이렇게까지 빨리 달려갈 줄이야!
10분 후, 그녀는 휴대전화의 GPS를 열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 그녀는 단 한 번도 그의 행적을 확인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전엔 노용성이 스스로 차량에 위치 추적장치를 설치하며, 그녀가 항상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든든한 안전감을 주겠다는 것도 이제와서 보니 정말 가소로웠다.
고청아는 차량 위치를 확인하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량 위치가 어떻게 그녀의 본가에 떠 있는 걸까?
3년 전, 그녀와 부모님은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녀의 부모님은 구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고청아는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암 진단을 받았다. 그녀는 한때 생을 포기하려 했었다. 그때 노용성이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으며 지켜주지 않았다면, 아마 그녀도 부모님을 따라 저 세상에 갔을 것이다.
노용성은 그녀가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할 까 봐 본가에서 떠나 지금의 대형 평층 아파트로 이사왔다. 그 후로 그녀는 오랫동안 본가에 발길을 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노용성이 왜 그곳에 간 거지?
문득 그녀는 예전에 본가에 설치한 CCTV가 있다는 걸 떠올렸다. 영상이 로딩되자마자 고청아는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별장은 여전히 예전 모습 그대로였지만, 부모님의 모습은 사라진 대신 한 모녀가 들락날락하는 모습이 비쳤다.
"아빠! 왜 이제와?" "여기 있잖아!" 노용성이 들어가자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그의 품으로 달려왔다. 노용성은 여자애를 들어 안고는 옆에 있던 여자애의 엄마를 품에 안아 입술에 뽀뽀를 했다.
"자기 며칠 동안 못 봐서 이슬이의 생일까지 놓칠 줄 알았는데." 여자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자, 노용성의 얼굴에 미안한 빛이 스쳤다.
"그 여자 오늘 퇴원 하자마자 내가 바로 여기 왔잖아. 화풀어. 내가 뭘 가져왔는지 봐봐." 노용성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온화한 표정으로 모녀를 달래며, 소녀에게 바비 인형 세트를 선물한 뒤, 여자에게는 보석함을 건넸다.
고청아는 똑똑히 알아봤다. 그것은 유명 브랜드의 최신 한정판 목걸이였다.
노용성은 사흘 뒤 그녀의 생일에 그 목걸이를 선물하겠다 약속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다른 여인의 목에 그 목걸이를 걸어주고 있었다.
고청아의 마음은 칼로 산산이 조각나듯 아팠다. 매를 맞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고청아는 상상도 못 했다. 노용성이 그녀를 본가에 가지 못하게 한 진짜 이유가, 그곳에 다른 여자를 숨겨뒀기 때문이었다니. '네 마음이 아플까 봐'란 말은, 가장 잔인한 핑계가 되고 말았다.
고청아는 스스로에게 멈추라고 말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보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결국 이전 CCTV 기록을 열어버렸다.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참았지만, 그 슬픔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노용성과 그 여자는 그녀의 부모님 집에서, 그녀가 누웠던 소파에서, 어머니가 가장 아끼던 부엌에서, 아버지가 좋아하던 흔들의자에서, 심지어 그들이 함께 잠들던 침실에서까지 방종한 즐거움에 빠져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침실 벽에는 고청아와 노용성의 결혼사진이 여전히 걸려있었다. 온 집안 곳곳엔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눴던 흔적들로 가득했다.
고청아의 눈물은 씁쓸한 웃음으로 바뀌었다. 고청아는 울다가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추잡한 화면들은 마치 그녀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참 바보같은 여인,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그녀는 눈물을 닦고 고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모, 마음을 바꿨어요. 경시에 수술을 받으러 갈거에요. 3일 후에 저를 데리러 와주세요."
노용성의 사랑은 모두 거짓이었다. 그녀가 착각했던 구원도 한낱 속임수에 불과했다. 더는 사랑 받지 못한다면, 그녀도 더는 매달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을 끝낼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