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우 오빠, 다리 근육이... 잔뜩 뭉쳤어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안, 반쯤 열린 방문 너머로 여자의 애교 섞인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손에 해장국을 든 시하린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오늘 밤 호텔 최상층에서 접대하는 사람들은 전부 거물급 인사들이었다. 매니저는 안에 있는 안 도련님은 신분이 존귀하니 절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막 노크하려던 그녀는 곁눈질로 문틈 사이를 보게 되었다.
단 한 번 보았을 뿐인데, 그녀는 마치 얼음창고에 갇힌 것처럼 온몸이 굳어버렸고, 혈액마저 꽁꽁 얼어 버린 것 같았다.
고급스러운 검은색 가죽 소파 앞에는 새하얀 오트쿠튀르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바닥에 반쯤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남자의 두 다리 사이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뛸 정도로 묘하고 야릇한 자세였다.
남자는 소파에 나른하게 기대 앉아 있었고, 단추가 두 개쯤 풀린 검은색 셔츠 사이로 차갑고 하얀 쇄골이 드러나 있었다.
그의 콧대에는 금테 안경이 얹혀 있었는데, 미간은 편안하게 펴져 있었으며, 오만하고 고귀한 기품을 풍기고 있었다.
시하린은 머릿속에서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폭탄이 동시에 터진 것 같았다.
그녀는 그 옆모습이 너무나 익숙했다.
비록 그가 값비싼 셔츠로 갈아입고 그녀가 평생 들어갈 수 없는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 앉아 있다 해도, 그녀는 단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건우.
그녀의 건우였다.
5년 전,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마을 뒤 진흙 구덩이에 쓰러져 있던 그를 업고 집으로 데려와, 사흘 동안 밤낮으로 곁을 지켜가며 염라대왕의 손에서 그 목숨을 구해 낸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기억을 잃고 갈 곳이 없었던 그는 마치 사람을 잘 따르는 대형견마냥 그녀를 졸졸 따라다녔고 5년을 함께 살았다.
바로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는 그녀를 안고 "하린아, 내가 돈 벌면 꼭 호강시켜 줄게."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하룻밤에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스위트룸에 앉아 있었고, 그의 다리 위에는 다른 여자가 엎드려 있었다.
"아까 발목을 삐끗했을 때,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송명희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손끝으로 남자의 정장 바지를 따라 천천히 위로 주물렀다. "여기는 아직 뻐근해요? 제가 좀 더 주물러 줄게요."
시하린의 귓가에는 온통 윙윙거리는 소리뿐이었고, 그녀는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온몸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고, 손가락은 전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쨍그랑!"
쟁반이 대리석 바닥에 떨어지면서 순식간에 산산조각 났고, 뜨거운 해장국이 바닥에 쏟아졌다.
등 뒤에서 웃고 떠들며 걸어오던 몇몇 젊은 남자들이 엉망이 된 바닥을 보고는 순식간에 얼굴을 굳혔다.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칠칠맞게!"
시하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안건우는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방금 전의 그 야릇한 상황은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차가운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하지만 시하린을 똑똑히 본 순간, 그의 눈동자가 급격히 수축하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시하린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의 얼굴에서 일말의 당황함이나 죄책감, 하다못해 켕기는 기색이라도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짧은 놀람 끝에, 안건우의 안경 너머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 안에는 오직 비밀을 들킨 후의 짜증과 방해받은 것에 대한 불쾌함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송명희가 치맛자락을 들고 따라 나왔다. 시하린을 발견한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주권을 과시하듯 득의양양한 기색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안 도련님, 여기 계셨군요."
복도에 있던 재벌 2세들이 즉시 웃으며 다가갔다.
"하씨 가문 쪽에서 방금 전화가 와서 약혼식 진행 순서를 직접 확인하시겠냐고 묻던데, 도련님은 여기서 느긋하게 쉬고 계셨네요."
옆에 있던 사람이 송명희를 힐끗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송명희 씨도 계셨습니까?"
"안 도련님은 곧 하씨 가문 영애와 약혼하실 텐데, 여전히 생명의 은인을 끔찍하게 챙기시네요. 하연미 씨가 알면 질투하시겠는데요."
안 도련님.
약혼.
생명의 은인.
단어 하나하나가 마치 둔기처럼 시하린의 가슴을 무참히 내리쳤다.
알고 보니,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가난한 청년이 전혀 아니었다.
그는 안씨 가문의 높고 고귀한 도련님, 안건우였다.
심지어 그는 집안이 비슷한 하씨 가문의 영애와 약혼을 앞두고 있었다.
오직 그녀만이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속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송명희 씨야말로 안 도련님의 복덩이시죠."
누군가가 옆에서 아부하며 말했다.
"송명희 씨의 뛰어난 침술이 아니었다면, 안 도련님께서 언제 기억을 되찾고 안씨 가문으로 돌아가 사업을 물려받으셨을지는 모를 일이죠."
"맞습니다. 안 도련님께서는 침을 두 번 맞으시고 모든 것을 기억해 내셨으니까요. 이런 생명의 은혜는 확실히 누구도 비할 바가 못 되죠."
송명희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쑥스러운 듯 웃었다.
"다들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전 그저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건우 오빠가 그동안 밖에서 떠돌며 고생을 많이 했는데,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이미 만족해요."
그녀는 바닥에 깨진 사기 조각을 이제야 본 것처럼 가볍게 탄성을 내뱉었다.
"어머, 이 종업원은 어쩜 이렇게 조심성이 없죠? 건우 오빠가 오늘 밤 술을 많이 마셔서 제때 해장국을 마시지 않으면 또 위가 아플 텐데요."
시하린은 화가 나서 온몸이 떨렸지만, 송명희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미동도 없이 안건우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송명희가 생명의 은인이라고?'
'그럼 나는 대체 뭔데?'
5년 전, 중상을 입은 그를 업고 집으로 돌아와 지혈을 하고 상처를 꿰매며 저승 문턱에서 목숨을 구해낸 것은 그녀였다.
그가 극심한 두통에 시달릴 때마다, 옛 상처가 재발할 때마다, 밤을 새워가며 그에게 침을 놓아주고 약을 달여 먹여주며, 혈자리를 주물러 준 사람 역시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모든 사람들이 송명희를 그의 은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안건우는 시종일관 침묵했다.
그는 그들의 관계를 해명하지 않았고, 그 사람들의 말을 정정하지도 않았다.
시하린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한 가닥의 요행마저 산산조각 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