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해."
서재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웠고, 반박할 수 없는 단호함이 묻어났다.
임유진은 책상 위에 놓인 이혼 합의서를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구나.'
평소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하던 남편이 오늘은 웬일인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그녀는 3년이라는 시간 끝에, 드디어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생각하며 하루 종일 기뻐하고 있었는데, 그가 그녀와 이혼하기 위해 집에 오라고 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임유진은 손을 꼭 움켜쥐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꼭 이혼해야 하나요?"
책상 앞에 앉은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3년 동안 그의 아내로 지낸 여자를 쳐다봤다.
그녀는 평범한 홈웨어에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고, 바쁘게 움직인 탓에 머리핀으로 대충 묶은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다. 두꺼운 검은테 안경이 그녀의 작은 얼굴을 가려 표정을 알아볼 수 없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흠잡을 데 없는 전업주부였다. 넓은 저택을 혼자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 억울한 일을 당해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집안일을 처리했다.
그래서인지 너무 순종적이여서 재미없고 지루하게 느껴졌다.
고진우의 눈빛에 짜증을 감출 수 없었고, 목소리에는 강경함이 묻어났다. "예월이가 돌아왔으니, 당신도 알아서 눈치껏 행동해 줬으면 좋겠어."
임유진은 고진우가 말하는 '예월'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소예월, 고진우가 해외에 보내 병 치레한 첫사랑이다.
3년 전, 소예월은 아무 말도 없이 해외로 떠났고, 고진우는 그녀를 찾기 위해 몇 번이나 해외로 떠났지만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해 거의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이후 업무에서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고씨 그룹이 파산할 위기에 처했고, 화가 난 고 회장은 중태에 빠져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고진우는 고 회장 앞에서 소예월을 포기하겠다고 맹세하고, 고 회장의 전우 손녀인 임유진에게 청혼했다.
하지만 결혼 후에도 그녀와 고진우는 명목상의 부부일 뿐, 소예월 때문에 고진우는 3년 동안 그녀를 한 번도 건드리지 않았다.
고진우는 그녀가 동의하지 않을까 봐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은 학력도 배경도 없으니, 내가 할아버지께 당신을 잘 보살펴 주겠다고 약속했어. 그러니 이혼 후의 생계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시내 중심에 있는 아파트를 당신에게 주고, 위자료로 60억 원을 줄게. 남은 인생을 잘 살기에 그 정도면 충분할 거야."
고진우의 눈빛은 여전히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가 임유진과 결혼한 건 소예월을 찾지 못해 절망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제 예월이가 돌아왔으니, 명목상의 결혼을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학력도 배경도 없는 고아인 임유진은 그와 결혼해 신분 상승을 이뤘고, 3년 동안 고 사모님으로 지냈다. 이혼 후에도 그녀에게 위자료를 줬으니, 그는 그녀에게 최선을 다한 셈이었다.
임유진은 고진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고 있었다.
그의 눈에 그녀는 고씨 가문의 재산을 탐내 그와 결혼한 여자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임유진은 고개를 숙이고 혀끝이 쓰게만 느껴졌다.
그녀가 지난 몇 년 동안 고진우를 위해 한 일은 아파트 한 채와 60억 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고진우는 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이혼 위자료에 불만을 품었다고 생각했다.
미간을 찌푸린 그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책상 위에 놓인 이혼 합의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욕심 많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 당신도 알겠지만, 당신의 능력으로 이 정도의 돈을 평생 노력해도 만져보지도 못해. 3일의 시간을 줄 테니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해. 만약 이혼 합의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위자료 한 푼도 받지 못할 거야."
"그럴 필요 없어요." 임유진은 고진우의 말을 가로챘다.
그녀는 남자의 어두운 안색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와 결혼한 지 3년이 지난 지금, 임유진은 비로소 눈앞에 있는 남자를 제대로 알게 된 것 같았다.
마음속에 무언가 완전히 죽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임유진은 책상 위에 놓인 펜을 집어 들고 이혼 합의서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