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노서연은 병원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긴급 통보를 받았다. 화재가 발생한 곳은 시내 중심에 위치한 5성급 호텔이었다.
구조 현장으로 달려가던 그녀는 남편 곽진명이 그 호텔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음이 다급해진 그녀는 소방관의 제지를 무릅쓰고 호텔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남편이 안에 있어요. 제발 들어가게 해 주세요."
"사모님, 불길이 너무 세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소방관의 제지에 막힌 노서연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불길에 휩싸인 호텔을 바라보며 곽진명이 무사하길 간절히 기도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 남자가 소방관의 호위를 받으며 호텔 밖으로 나왔다.
익숙한 실루엣에 노서연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곽진명이었다!
'다행이야. 무사해.'
노서연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려 할 때, 그녀의 몸이 자리에 굳어버렸다.
곽진명의 품에 가운만 걸친 여자가 안겨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평소에 자주 만나지 못하는 두 사람은 함께 식사를 하기로 약속했지만, 곽진명은 급한 회의가 생겼다며 약속을 취소했다.
그는 다른 여자와 호텔에서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녀는 영원히 이 사실을 모른 채 살았을 것이다.
노서연의 몸이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마스크 아래에 있는 그녀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그녀가 자리를 피하려 할 때, 곽진명이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입체적이고 깊은 이목구비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이마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분명 그가 더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그의 관심은 오직 품에 안긴 여자에게만 쏠려 있었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자 곽진명이 다급하게 말했다. "의사 선생님, 이 여자 괜찮은지 확인해 주세요."
노서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마스크와 보호 안경을 착용한 그녀를 곽진명은 알아보지 못했다.
"곽..." 노서연이 어렵게 입을 열었지만, 여자의 신음 소리에 말이 끊겼다.
"진명 씨, 너무 아파요..." 임유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곽진명이 차가운 눈빛으로 노서연을 돌아보며 날카롭게 말했다. "뭐 하는 거야? 빨리 치료해. 사람이 아프다고 하잖아."
의사인 노서연은 억지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구급차에 올려보내세요. 상처부터 치료하겠습니다."
구급차에 올라탄 후, 노서연은 소독수를 들고 임유나 앞에 섰다. 그녀는 눈앞에 있는 여자를 자세히 살폈다.
그녀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는 몸집이 작고 가냘팠다.
목에는 값비싼 보석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임유나의 얼굴을 확인한 노서연은 깜짝 놀랐다.
임유나는 그녀와 너무 닮았다. 특히 눈매가 더욱 그랬다. 임유나는 온화한 인상으로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얼굴이었다.
노서연은 그제야 대충 이해가 갔다. 3년 전, 곽진명이 그녀를 한 번 보고 결혼을 결심한 이유를.
그녀는 임유나의 대용품일 뿐이었다.
노서연의 손에 든 소독 솜이 임유나의 상처에 닿자마자 그녀가 흐느끼며 말했다. "진명 씨, 너무 아파요. 저 죽는 건 아니겠죠?"
곽진명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더니 다치지 않은 손으로 임유나를 품에 안고 차갑게 말했다. "조금만 살살해 주세요."
노서연은 가슴이 또다시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임유나가 곽진명의 옷깃을 잡고 순진무구한 얼굴로 말했다. "진명 씨, 너무 화내지 마요. 의사 선생님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곽진명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너무 착해. 항상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노서연은 곽진명의 다정한 모습을
낯설게 느꼈다.
두 사람이 함께한 3년 동안, 곽진명은 항상 엄숙하고 차가운 태도를 유지했다.
하지만 임유나를 대할 때만큼은 자세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대했다.
노서연은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임유나의 상처를 치료했다. 입술을 세게 깨물었지만, 마음속에서 피어 오르는 서러움을 막을 수 없었다.
임유나는 노서연을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의사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 사람이 저를 너무 걱정해서 그래요. 서운해하지 말아요."
노서연은 차갑게 식은 얼굴로 소독 솜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괜찮아요. 익숙해요, 이젠."
그녀는 봉합 도구를 꺼내 곽진명의 상처를 치료했다.
곽진명은 송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송택, 오늘 노서연 생일이야. 케이크 주문해서 집으로 보내."
"이전 구매 기록을 확인하고 제일 비싼 케이크로 주문해."
노서연은 눈을 크게 떴다. 결혼 후, 그녀의 생일 케이크는 모두 송택이 골랐던 것이다.
'곽진명, 너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있어?'
잠시 딴생각을 하던 그녀가 실수로 소독 솜으로 곽진명의 상처를 찔렀다.
곽진명은 미간을 찌푸리고 날카롭게 추궁했다. "의사 맞아? 왜 벌써부터 정신을 못 차리는 거야?"
말을 하면서 그는 노서연의 가슴에 걸린 명찰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