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 몸의 기억과 완전히 융합된 후, 그녀는 깊은 침묵에 잠겼다.
젠장, 알고 보니 책 속에 빙의한 것이었다.
그녀는 예전에 이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내용인 즉, 중앙 제국에서 길을 잃었던 S등급 암컷 진짜 공주님이 돌아온 후, 두 오빠의 사랑과 부모님의 애지중지를 한 몸에 받으며, 십여 명의 우수한 수컷들과 끝없이 썸을 타다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역하렘 소설이었다.
그 당시 강지연은 꽤 재미있게 읽었다. 수많은 멋진 남자들이 여주인공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질투하며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모습이 꽤나 통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빙의한 인물은 여주인공이 아니라, 여주인공과 대비되는 역할, 가짜 공주 강지연이었다.
예전에 책을 읽을 때부터 자신과 이름이 같은 이 캐릭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캐릭터 자체가 딱히 악독해서는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툭하면 독약을 타거나 함정에 빠뜨리고, 살인 청부까지 하는 전형적인 악녀에 비하면 몸 주인은 큰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다. 다만 남자를 좀 밝히고 제멋대로 굴며, 정신력이 좀 낮았을 뿐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 캐릭터에게 세상의 모든 악의를 쏟아부은 듯했다.
진짜 공주님이 돌아오자마자, 한때 강지연을 예뻐했던 부모는 그녀를 뻐꾸기처럼 남의 둥지를 차지한 사기꾼으로 취급했다.
강지연을 감싸주던 두 오빠는 그녀가 여동생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며 혐오했고, 마음에 품었던 수컷조차 그녀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귀족 사회에서 그녀를 따르던 이들도 모두 등을 돌리고 비웃었다.
이후 전개에서는 몸 주인이 2차 각성을 통해 정신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하여 제국에서 보기 드문 S등급 암컷이 되었음에도, 결국 여주인공의 압도적인 버프에 짓눌려 죽고 말았다.
강지연은 결국 모든 것을 빼앗기고 황량한 행성으로 추방되어 산 채로 굶어 죽는 최악의 결말을 맞이했다.
그와 동시에, 여주인공은 자신의 남자들과 알콩달콩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강지연은 분통이 터질 것 같았지만, 자신이 훗날 이 소설 속에 빙의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빙의한 후 미친 듯이 고민한 끝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은 아직 이야기의 초반부라, 충분히 기회가 있었다.
진짜 공주님이 돌아오기까지는 아직 2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정신력은 아직 2차 각성을 이루지 못한 C등급이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진짜 공주님이 돌아오기 전에, 자신의 몸을 지킬 무언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돈?
몸 주인은 정신력이 낮은 탓에, 사치를 부림으로써 자격지심을 감추려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매달 받는 생활비가 적지 않았음에도, 막상 계좌를 확인해 보니 빈털터리 신세였다.
그렇다면 권력인가?
몸 주인은 암컷이긴 하지만 정신력이 형편없었고, 공주라는 이유로 응석받이로 자라 아무것도 하려 들지 않았다. 그래서 제국에서 맡은 직책 하나 없이, 그저 장식품에 불과했다.
그녀는 꼬박 하룻밤을 고민한 끝에, 결국 '사람'에게서 답을 찾기로 했다.
여주인공의 사람을 뺏어 보기로 한 것이다.
물론 여주인공에게 충성을 다하는 남자 주인공들을 뺏으려는 게 아니었다. 강지연이 노리는 건, 이야기 속에서 여주인공의 눈에 들지는 못했지만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들이었다.
쉽게 말해, 여주인공의 어장 속 치어들이었다.
예를 들면, 후반부에 여주인공의 가장 충실한 호위가 되는 육도결 같은 인물 말이다.
육도결은 죄인의 후손으로, 2년 전 가문이 몰락했다. 가족들은 처형당하거나 유배되었고, 그 자신은 노예로 전락하여 노예 시장에 흘러 들어왔다.
여주인공이 나타났을 때, 육도결은 이미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꼬박 4년 동안 고문당해 숨만 붙어 있는 상태였다.
여주인공이 그를 사서 치료해 준 대가로, 육도결은 그녀에게 온 마음을 다해 충성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2년 먼저 이 세상에 와서 그 충성의 대상을 바꿔 버린다면, 그게 나쁠 것도 없지 않은가?
강지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시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원작에서 육도결은 늑대족이며, 얼굴에는 '죄인 노예'를 뜻하는 낙인이 찍혀 있다고 묘사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10분 가까이 걸었지만, 그 특징에 맞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옆에 있던 노예주가 쉴 새 없이 떠들어대자, 강지연이 싸늘한 어조로 말을 잘랐다.
"죄인 노예는 없나? 늑대족이라면 더할 나위 없고."
그 말을 들은 노예주는 순간 몸을 움찔했다.
죄인 노예를 사러 오는 암컷은 열에 아홉이 그냥 분풀이용 장난감으로 사 가서 마구 채찍질하며 괴롭히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 셋째 공주님은 정말 분풀이용 장난감을 사러 온 모양이었다.
그때, 여태껏 끼어들지 못하고 있던 옆의 다른 노예주가 눈빛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있습니다! 전하, 저에게 딱 한 놈이 있습니다!"
강지연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리더니 턱짓으로 명령했다. "안내해."
노예주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시장 안쪽 깊숙한 곳으로 이끌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비릿한 피 냄새가 더욱 짙어졌다.
마침내 그들은 한 우리 앞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우리는 비좁았고, 위에는 두꺼운 검은 천이 덮여 있어 마치 커다란 개집 같았다.
노예주는 아첨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검은 천을 천천히 걷어 올렸다.
"이 노예는 아직 완전히 길들여지진 않았습니다만, 몸이 튼튼해서 맷집도 좋고, 젊어서 회복력도 빨라 오래 가지고 노실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육도결은 자신의 이른바 장점에 대한 설명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는 쇠사슬에 묶인 자신의 손발을 한번 쳐다보고는, 입에 물린 재갈을 잘근거렸다.
'누구일까. 누구든 좋으니, 제발 한 번에 끝내 줬으면. 더 이상의 고문은 그만 하기를.'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그는 순간적으로 눈을 뜰 수 없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우리 밖에 서 있는 가냘픈 한 여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기분 좋은 향기가 이 썩어 문드러진 피비린내를 순식간에 꿰뚫고 그의 콧속 깊숙이 파고들었다.
육도결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윤곽을 똑똑히 보려고 애써 고개를 들었다.
역광 속에서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두 눈동자뿐이었다.
곧이어 맑고도 명랑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쟤로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