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분노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윤나연이 너한테 약이라도 먹였어? 그때 윤나연 때문에 죽을 뻔한 거 잊었어? 그 여자 때문에 너 5년 동안 꼼짝 못하고 침대에만 누워서 지냈잖아. 그 5년 동안 널 돌본 게 누구야! 응? 네 아내야! 송세아라고! 이제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니 언제 그랬냐 싶은 거지? 응? 지 버릇 개 못 준다더니 또 그 재수없는 여자 때문에 지 마누라 목숨까지 내팽개치려는 거야?"
"그만해요." 정남일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골수 이식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세아도 이제 괜찮아요. 그러니 더 이상 언급하지 마요. 나연이도 이제 막 회복했으니 누나가 그러면 기분이 상할 거예요."
그러자 정채윤은 악을 쓰며 소리쳤다. "그럼 세아는? 네 마누라 송세아는 대체 뭔데?"
병실 밖에서 모든 걸 엿들은 송세아는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부여잡고 차가운 벽에 기대어 무너져 내리는 몸을 겨우 지탱했다. 그 순간,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강한 메스꺼움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며 주체할 수 없이 구역질을 해댔다.
'이런 개자식!'
송세아는 스무 살 되던 해 정남일을 만나 첫눈에 반했다.
5년 전, 윤나연으로 인해 원한을 사게 된 정남일은 잇따른 보복에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위기의 순간, 송세아는 목숨을 걸고 정남일을 구했고, 그 과정에서 괴한이 휘두르는 칼에 세 곳을 찔렸다.
그녀가 구출되었을 때,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그리고 그녀가 퇴원할 때, 정남일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그녀를 꼭 끌어안고 평생 그녀만 사랑하겠다고 약속했다.
결혼 후, 그는 다정하고 자상하며 아내만 바라보는 완벽한 남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라고 믿었다.
하지만 정성스럽게 가꿔온 두 사람의 행복이
건강 검진 한 번으로 산산조각 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병실 안에서 들려오던 격렬한 말다툼 소리가 어느덧 잠잠해진 것 같았다.
송세아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허리를 곧게 편 다음, 무거운 병실 문을 열었다.
병실 안, 눈시울이 붉어진 정채윤은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소리를 듣고 뒤돌아선 정남일의 눈빛에 죄책감이 스치는 듯하더니 이내 평소의 다정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약 받아왔어?"
말과 함께 그녀 앞에 다가선 그가 약 봉투를 건네받으려고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송세아는 그의 손을 슬쩍 피하며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응. 이제 집에 가도 돼?"
정남일은 아무렇지 않은 듯 손을 거두고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집에 가자."
병원을 나설 때, 간호사 스테이션을 지나자 두 젊은 간호사의 부러움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 선생님과 사모님 좀 봐. 정말 선남선녀가 따로 없다니까."
"사모님은 정말 행복하겠어. 정 선생님은 잘생긴 데다 돈도 많고, 스캔들 한 번 없었잖아. 딱 소설 속 남주라니까."
"그러게. 사모님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완벽한 남편을 만날 리 없지."
'완벽한 남편?'
송세아는 마음속으로 차갑게 실소했다.
'내 능력을 이용해 회사에서 입지를 다진 남자가?
이제는 애인을 위해 자신의 아내를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는 장기 저장고로 여기는 남자가?
그래, 정말 개좆같은 완벽한 남편이지.'
두 사람이 병원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정남일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흘깃 내려다본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빠르게 화면을 껐다.
하지만 송세아는 화면에 선명하게 떠오른 이름을 똑똑히 보았다. 윤나연.
그 순간,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심장이 잡힌 듯 가슴이 턱 막히며 숨이 가빠오더니 온 몸에 오한이 들었다.
"누구야?" 목이 바싹 마른 그녀가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어? 아무것도 아니야.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한번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정남일은 태연한 목소리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내가 택시 불러줄게. 집에 가서 푹 쉬어."
송세아는 그의 손길을 피하고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오늘 주말이잖아. 그렇게 급한 일이야? 내일은 안 되고?"
정남일은 잠시 멈칫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우리 세아 착하지? 얼른 처리하고 올게."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거절할 수 없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정남일은 바로 휴대폰을 꺼내 익숙하게 택시를 불렀다.
그는 그녀가 차에 올라타는 것을 보고 직접 문을 닫아주었다.
"집에 도착하면 문자 보내." 그는 차창을 통해 당부하며 여전히 완벽한 미소를 지었다.
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송세아는 백미러를 통해 망설임 없이 몸을 돌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는 눈에 띄는 검은색 벤틀리에 올라타더니 회사와는 정반대 되는 방향으로 사라졌다.
송세아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빛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혼? 그래, 이혼!
이혼을 해야지!
내 사업과 재산을 절대 그 연놈들에게 빼앗겨서는 안 되지.'
송세아는 휴대폰을 꺼내 거의 걸어본 적 없는 번호를 찾았다.
그 번호는 그녀의 대학교 선배인 강진택의 번호였다.
강진택은 강성에서 제일가는 변호사로, 예리한 수완과 100%승율로 유명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선배.
저 송세아예요."
송세아가 전화를 끊자마자
낯선 번호로 문자가 도착했다.
[사모님, 골수 고마워요. 그리고 고마운 마음에 충고를 드리는 거니 아니꼽게 생가지 마세요. 결혼 생활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상간녀인 겁니다. 그러니 더 이상 집착 마시고 일남이의 곁을 떠나세요.]
문자는 뜨겁게 달궈진 인두마냥 송세아의 심장을 태웠다.
휴대폰을 세게 움켜쥔 그녀의 눈앞이 아찔하게 어두워졌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걱정스럽게 그녀를 돌아보았다.
송세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거칠게 차창을 내리고 바람을 맞으며 가슴을 찢는 듯한 증오를 겨우 억눌렀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출발할게요." 운전기사가 액셀을 밟았다.
그때, 검은색 마이바흐 한 대가 그녀가 탄 택시를 스쳐 지나갔다.
뒷좌석에서 서류를 검토하던 한태준은 갑갑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 차창 밖으로 송세아의 창백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차 돌려."
한태준의 두 눈에 놀라움이 스치더니 망설임 없이 명령했다.
"앞에 있는 저 택시를 따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