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외에 위치한 폐기된 창고.
"아악!" 김지안이 눈물을 펑펑 쏟아내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몸을 떨었다. "오빠! 운재야! 살려줘!"
"지안아!"
"지안이는 풀어줘. 김민정은 너희 마음대로 해도 돼!" 장남 김민준은 잔뜩 가라앉은 얼굴로 주먹을 움켜 쥔 채 놈들을 쏘아 봤다. 마치 사람이라도 죽일 듯한 눈빛이었다.
"지안이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건드리기만 해봐! 너희들 전부 찢어 죽일거야!" 둘째 김민혁의 안경에 싸늘한 살기가 비쳤고 이성이라곤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조건은 원하는 대로 불러! 지안이만 풀어 주면 돼! 김민정 그 문제아는 너희 마음대로 해!" 셋째 김민현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
기둥에 묶인 김민정은 눈을 꼭 감았다.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김씨 가문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 오빠의 입에서 자신을 포기하겠다는 말을 직접 들은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고 숨도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그들의 차가운 말투는 마치 쓰레기를 버리듯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야 말로 그들의 친동생이다!
고생 끝에 겨우 다시 가족을 찾았건만!
김민정과 김지안은 함께 납치범에게 납치되었다. 몸 값을 받아내는 자리에서 놈들이 말했다. 둘 중하나만 풀어 주겠다고 말이다. 그러자 그녀의 세 오빠는 약속이라도 한 듯 전부 김씨 가문의 양녀 김지안을 선택했다.
"불쌍해서 어떡하냐? 네 오빠들은 너한테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네?"
납치범은 김지안을 풀어주더니 김민정의 턱을 잡고 비웃었다.
"우리 언니한테서 손 떼!" 김지안이 힘없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지만 김민정은 그녀의 눈에 스치는 득의양양한 빛을 똑똑히 보았다.
이제 김민정에게 남은 마직막 희망이라곤 그녀의 약혼자 류운재 밖에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 잘생긴 얼굴에 깔끔한 옷차림을 한 남자가 서있었다.
"운재야…" 김민정이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불렀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구해 주리라는 마지막 희망을 품고 애처롭게 그를 쳐다보았다.
곧이어 류운재의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씨 가문에서 이미 선택을 한 모양이군요. 저도 김씨 가문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저도 지안이를 선택하겠습니다."
그의 말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김민정의 심장을 꿰뚫었다.
너무 아팠다.
류운재, 그녀가 3년간 미친 듯이 사랑했던 남자다.
'냉정하고 무심한 인간!'
그녀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녀는 한때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 얼굴을 뚫어지게 쏘아봤다. 지금 이 순간, 그의 얼굴은 낯선 사람처럼 차갑기만 했다.
과거, 그녀는 류운재를 구하려다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다.
하지만 지금…
'하!'
류운재는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오직 김지안 밖에 없었고 조심스레 밧줄을 풀어 주고 있었다.
배신의 아픔보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건 여태 바보처럼 그들에게 속아왔던 자신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 가소롭게 느껴졌다.
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
그녀가 밧줄에서 풀려나기 바쁘게 김씨 3형제와 류운재가 그녀를 에워싸더니 서둘러 안부를 물었다.
김민정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녀는 마치 버려진 쓰레기 같았다.
그녀는 김씨 가문 사람들이 김지안을 보살피며 떠나는 모습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김민정은 눈을 감았다.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눈가에서 흘러 내렸다.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눈 앞에 보이는 건 음흉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납치범들이었다.
"불쌍해서 어떡하냐? 하지만 괜찮아, 오빠들이 예뻐해 줄 테니까. 근데 김씨 가문 놈들이 가짜 딸을 위해 친딸을 포기 할 줄, 누가 알았겠어?"
"예쁜아. 진실을 말해 줄까? 이 일은 사실, 김지안이 계획한 거야. 널 제거하려고 말이야."
"얘들아, 서두르지 마. 한 명씩 차례대로… 함께 즐겨야지."
김민정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온몸을 휩쓸었다.
"꺼져!" 그녀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나 사정없이 얼굴에 떨어진 따귀에 전신이 혼미해 졌다.
"꽤 사나운 걸?" 선두에 선, 얼굴에 칼자국 난 남자가 음흉하게 웃으며 그녀의 옷을 찢어발겼다. "난 사나운 년이 좋더라고..."
김민정의 등이 벽에 닿았다. 더 이상 물러 설 곳은 없었다. 여태 고함을 쳤던 탓에 목은 이미 쉴 대로 쉬어버렸고 묶여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놈들을 바라보는 그녀는 절망에 휩싸였다.
김민정은 죽음을 각오한 듯 고개를 번쩍 들더니 벽에 머리를 세게 박으려 했다.
바로 그때!
"탕!"
귀를 찢을 듯한 총소리가 창고의 적막을 깨뜨렸다.
겁에 질린 납치범들은 멍하니 총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작전복으로 통일한 무리가 두 팀으로 나뉘어 창고로 쳐들어 왔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짙은 살기가 창고 안을 가득 채웠다.
이내, 체격이 훤칠한 남자가 앞으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창고의 조명이 그의 날카로운 턱선과 싸늘한 눈매를 비추었고 그의 온몸에서 살벌한 기운과 함께 숨막힐 듯한 압박감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손에는 외형이 독특한 권총이 쥐어져 있었고 총구에서는 희미한 연기가 피어 올랐다.
"당장 멈춰. 뒤지고 싶지 않으면." 낮게 깔린 중저음에 싸늘한 살기가 묻어났다.
사실 서건우는 배신자를 처단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마주칠 줄이야.
그는 쓸데없는 일에 엮이고 싶지 않았다. 조직간의 전쟁, 납치, 공갈. 이런 한적한 곳에서 그런 일은 흔하게 일어 났다.
그가 냉정하게 돌아서려던 그때, 그의 시야에 여자의 옆모습이 스쳤다. 창백한 얼굴과 꺾이지 않는 눈빛, 왠지 모를 익숙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