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에 서지안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발코니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 허준혁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방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투신? 걔 그런 배짱이 없어! 자살 소동이 몇 번째야. 진짜 피라도 본 적 있어?"
이어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를 더 지시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너무 작아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허준혁이 전화를 끊고 뒤돌아보자 서지안과 눈이 마주쳤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낀 서지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엔 진유나를 찾아가지 않았어… 그럼, 날 속인 건 아닌 걸까? 그때 정말 마지막인 걸까?'
"뭘 그렇게 쳐다봐? 곧 결혼식 시작이야. 준비 다 됐어?" 허준혁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서지안은 여전히 기분이 좋았다. 그녀는 허준혁이 선천적으로 감정이 무딘 사람이라, 타인의 감정에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풋풋한 호감에서 시작해, 지금의 진심 어린 사랑까지. 드디어 결실을 맺는다고 믿었다.
'나는 준혁이한테 특별한 존재일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겠어?'
서지안은 환하게 웃으며 그의 팔짱을 꼈고, 눈꼬리가 행복하게 휘어졌다. "준혁아, 우리 드디어 결혼하네…"
허준혁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응, 알고 있어."
그때, 대기실 문이 활짝 열리며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식장 안을 가득 메웠다. "이제 신랑, 신부가 입장하겠습니다."
서지안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허준혁의 팔짱을 끼고 단상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기도 전에, 허준혁의 휴대폰 벨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사회자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객들은 이미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서지안의 얼굴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진유나 전용 벨소리이었다. 그녀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소리였다.
허준혁은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어, 또 왜?"
사회자는 당황한 듯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다. 몇 년간 사회를 맡아 왔지만 이런 돌발 상황은 처음인 듯했다.
그러나 그가 말을 잇기도 전에, 한마디를 남긴 허준혁은 성큼성큼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지금 바로 갈게."
순식간에 하객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퍼졌다.
"가지 마…" 서지안은 웨딩드레스를 움켜쥔 채 그의 뒤를 쫓으며 애원했다."그때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허준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차갑게 득실을 따지는 듯 잠시 침묵했다. 몇 초 후,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나가 진짜로 뛰어내렸대. 내가 가봐야겠어. 넌 하객들 좀 진정시키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허준혁!" 서지안은 그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놓을 생각이 없다는 듯 힘을 주었다. "지금 가면, 나 이 결혼 안 해!"
허준혁은 그녀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그럼 후회하지 마."
그 한마디에 심장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서지안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허준혁은 그녀의 눈물을 보고 마음이 아주 조금 흔들렸지만, 결국 서지안이 한 발 물러설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늘 그랬으니까. 그녀는 언제나 나를 쉽게 놓지 못했잖아.'
그는 서지안이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곱게 자란 재벌가 아가씨가 가족과 인연까지 끊고 경성까지 내려와, 자신의 곁에서 고생을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도.
무슨 일이 생기든 그녀는 늘 자신의 편이었다. 서지안의 가장 큰 소원이 허준혁과 결혼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진유나가 자살 소동을 벌일 때마다, 뒤에서 수습해주는 것도 서지안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말로 자신을 협박하는 것을 보니, 그만큼 단단히 화가 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진유나 쪽은 이번에야말로 실제 사고가 벌어진 상황이었다. 그는 서지안의 감정에 휘둘려 있을 수 없었다.
허준혁이 무의식적으로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주머니 속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으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순간, 하객들은 서로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봤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신랑은 왜 도망간 걸까?'
결혼식장이 혼란에 빠진 것을 본 서지안은 눈물을 닦고 정신을 차린 뒤, 멍하니 서 있는 사회자의 손에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오늘 결혼식은 취소되었습니다…"
순간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하지만 서지안은 더 이상 그 소란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오늘 이후, 자신이 경성에서 가장 큰 웃음거리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모두가 서지안이 허준혁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수많은 재벌가 자제들의 구애를 거절하고, 가난한 그를 따라 고생을 선택했다는 사실도. 그런데 마침내 결실을 맺는 날, 그녀는 버림받았다.
서지안이 호텔 밖으로 달려 나갔을 때, 호텔 입구는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멀지 않은 곳, 에어 매트리스 위에 웨딩드레스를 입은 진유나가 누워 있었다. 허준혁은 그런 그녀를 품에 안고 있었다.
진유나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있었다. "준혁아… 어떻게 나를 혼자 두고 가? 우리 평생 함께하기로 약속했잖아."
"그만해." 허준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 표정도 없었다.
진유나는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 짙은 먹물처럼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싫어!"
서지안은 진유나의 행동을 보고 허준혁이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자신도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바라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차갑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얼굴 만지는 거 싫어."
차가운 목소리에 눈동자에는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허준혁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진유나가 그의 잘생긴 얼굴을 마음대로 어루만지도록 그대로 두었다. 결국 진유나는 울음을 멈추고, 환하게 웃었다.
서지안은 그동안 허준혁의 감정 표현 장애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차갑고 무심한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진유나를 품에 안은 채 구급차에 오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허준혁의 얼어붙은 마음도 자신이 곁에 있으면 녹아내릴 거라고 믿었다. 그러면 그 맑고 서늘한 눈동자에도 자신을 향한 기쁨과 다정이 스며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녀의 뺨을 후려치듯 가혹했다.
알고 보니 허준혁에게 감정이 없는 게 아니었다. 다만, 그 감정이 자신을 향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서지안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지난 5년 동안 나는 대체 뭐였을까? 서지안, 너 정말 어리석고 한심해. 지난 5년은 그저 한바탕 꿈이었을 뿐이야. 이제 꿈에서 깼으니 정신 차릴 때도 됐지.'
서지안은 대기실로 돌아와 웨딩드레스를 벗고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결혼식 파토의 후폭풍은 거셌다. 서지안이 로펌으로 돌아오자,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동료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서지안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원래 체면 같은 건 따지지 않는 성격이었다. 어린 시절에도 법학과 천재로 불리던 허준혁을 먼저 따라다니며 고백했고, 그때 이미 학교 전체의 웃음거리가 됐다.
그럼에도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이제야, 뼈아픈 상처를 입고 나서야 허준혁이 자신을 사랑한 적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서지안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에서 사직서를 인쇄하고 서명한 뒤, 허준혁의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사직서를 내려놓자마자 휴대폰이 진동했다.
허준혁의 전화였다.
"결혼식 취소했다며? 왜 나랑 상의도 없이 그런 결정을 해? 이게 로펌에 얼마나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지 알아?"
"그럼 취소하지 말았어야 해? 그 많은 하객들을 호텔에 앉혀 두고, 네가 영웅 놀이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게 할까?"
허준혁은 몇 초간 침묵했다. 서지안이 이렇게 정면으로 맞설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두 사람이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부터, 서지안은 작은 태양처럼 그의 주변을 맴돌며 쉴 새 없이 말을 걸었다. 늘 활기가 넘쳤고, 얼굴에는 언제나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 화를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 잘못이야. 내가 생각이 짧았어." 허준혁은 언제나처럼 이성적이고 차분했다.
서지안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의 나는 정말 겁도 없는 철부지였지. 타고나길 감정에 무딘 사람이 어떻게 나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사직서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허준혁, 내 사직서…"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전화기 너머에서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아, 허리가 너무 아파. 빨리 와서 주물러 줘."
"나 지금 바쁘니까, 이만 끊는다." 그 말을 끝으로 통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휴대폰 너머로 차가운 통화 종료음만이 길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