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윤아, 넌 구지영처럼 재미도 없는 애보다 훨씬 낫다. 처음도 나한테 내주고. 예뻐 죽겠어."
빨간색 침대 위에서, 남자의 거친 숨소리와 여자의 야릇한 신음 소리가 뒤섞인 채 두 그림자가 얽혀 있었다.
"서윤아, 소리 내봐!" 남자가 여자의 가는 허리를 움켜쥐고 낮은 목소리로 유혹했다.
"안 돼요, 시헌 오빠. 여긴 오빠와 지영이의 신혼방이잖아요. 지영이가 돌아오면 어떡해요?"
송시헌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걱정 마. 지금쯤 걔는 바보처럼 와이너리를 돌아다니면서 내가 좋아하는 와인을 찾고 있을 거야. 그런데 그 와인, 이미 내가 사 놨어. 방금 너랑 같이 마신 게 바로 그거거든."
"아잉, 시헌 오빠. 정말 나빠요."
그 순간, 남녀의 희롱 섞인 목소리가 수많은 가시처럼 구지영의 심장을 동시에 찔러 왔다.
그녀는 자신과 송시헌의 신혼방 문 앞에 조용히 서서, 열린 문틈으로 손가락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녀는 문을 밀어 열지 않았다. 이성을 잃고 뛰어들어 그들의 위선을 들춰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들어가 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녀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안에서 벌어지는 장면은 그녀의 눈을 더럽힐 수 없었고, 오직 마음만을 더럽힐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철저히 멍청한 바보였으니까.
1년 전, 구지영은 '혼향'의 제조법을 찾기 위해 산을 내려왔다가, 조향 세가의 후계자 송시헌이 검은 차량 여러 대에 쫓기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녀는 목숨을 걸고 그를 구했고, 그 대가로 두 눈을 잃었다.
송시헌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맹세했다. 결혼으로 보답하겠다고, 평생 곁을 떠나지 않고 돌보겠다고 말했다.
19살의 구지영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송시헌에게 첫눈에 반했다.
그 교통사고는 그녀가 송시헌을 처음 본 날이자, 마지막으로 본 날이었다.
온갖 애를 써 거금을 들여 산 레드 와인을 손에 쥔 채, 구지영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장님용 지팡이를 짚고 그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서윤아, 내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처음부터 너였어. 내일 그 눈먼 년이랑 결혼 안 해. 그 여자 개코가 내 향수 사업에 좀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였지, 아니었으면 아버지 말 듣고 그런 병신을 집에 들일 이유도 없었어. 게다가 걔, 네 집안에서 시골 고아원으로 보낸 사생아잖아? 태어날 때부터 불길한 년이 어떻게 너 같은 정통 구씨 가문 아가씨랑 비교가 되겠어. 감히 나 송시헌의 짝이 될 수나 있겠냐고."
그는 비웃듯 말을 이었다. "맞다. 육씨 가문 그 망나니랑 도박하다가 졌거든. 그래서 빚 대신에 걔를 팔아넘겼어. 내일, 좋은 구경이나 해 보자고."
그 말에 구지영의 청초한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공허한 두 눈에는 거대한 검은 그물이 드리운 듯, 한 줄기 빛조차 스며들지 않았다.
'허허! 눈이 먼 게 당연하지, 구지영. 이게 바로 네가 그렇게 시집가고 싶어 했던 남자라니. 짐승과 다를 게 뭐가 있지?'
구지영이 지팡이를 짚고, 한 걸음 한 걸음 더듬으며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녀는 이곳에서 1년을 살았기에, 1층에서 2층까지 계단이 총 몇 개인지, 가구와 물건들이 어디에 배치되어 있는지까지 모두 똑똑히 외우고 있었다.
송시헌은 그녀가 다칠까 봐 별장 위아래의 날카로운 모서리마다 충돌 방지 스트립을 붙여 주었다. 바로 그런 세심함과 다정함이 그녀의 마음을 서서히 붙잡았고, 결국 깊이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걸었고, 발걸음이 무언가에 걸려 비틀거리며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 지팡이가 버텨주어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계단 위를 이리저리 더듬었다.
그때, 그녀의 작은 손에 보잘것없이 작은 천 조각 하나가 걸렸다. 레이스에, 진주까지 박혀 있었다.
구지영은 그것이 야한 속옷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구지영은 이런 노골적으로 섹시하고 도발적인 스타일의 옷을 입어 본 적이 없었다.
머릿속에는 지금쯤 침대 위에서 뒤엉켜 있을 남녀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위 속에서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서둘러 그 더러운 물건을 던져버리고, 걸음을 재촉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으로 내려온 구지영은 와인 오프너와 와인잔을 찾아냈다. 숙성도 시키지 않은 채, 자신을 위해 와인을 한 잔 따랐다.
눈이 멀어버린 자신을 위해서였다.
지난날 달콤했던 레드 와인이 유난히 목을 태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별장 입구 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입구에서 하인들이 공손히 맞이하는 소리에, 구지영은 온 사람이 누구인지 확신했다.
송시헌의 어머니, 그녀의 미래 시어머니 서문희였다.
이번에 직접 온 것은 그녀에게 맞춰 제작한 웨딩드레스를 가져다주기 위함일 것이다.
고급 맞춤 새틴 드레스를 입은 서문희가 두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녀를 본 순간, 상대의 얼굴에 분노가 그대로 드러났다. 구지영이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것도 모자라, 내일 밤에 쓸 합환주를 들이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자 불같이 화가 치민 것이다. "이게 시헌이가 얼마나 어렵게 구한 술인데, 네가 감히 이걸 마셔? 내일 밤엔 뭘 마시라고? 정말 눈먼 사람 하나 들였다고, 괜히 남들 속만 다 뒤집어 놓네."
구지영은 무심하게 와인잔을 흔들며, 옅게 입꼬리를 올렸다. "어차피 제가 마실 술인데요. 지금 마시나 나중에 마시나 무슨 차이가 있죠? 어머님도 한 잔 드시고 싶으신가 봐요. 아직 여기 남아 있는데, 같이 한 잔을 하시겠어요?"
그녀는 반 병쯤 남은 술병을 집어 들어 건넸다. 칠흑처럼 긴 머리칼이 어깨를 따라 흘러내려 있었고, 맑은 두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그럼에도 눈매만큼은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서문희는 기가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너..."
'평소엔 얌전하기만 하던 애가, 오늘은 왜 이렇게 말이 날카로운 거지…?'
내일이 결혼식이라 준비할 일이 많았던 탓에, 서문희는 이 자리에서 괜히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뒤에 서 있던 디자이너에게 눈짓으로 웨딩드레스를 가져오게 했다. "이건 널 위해 맞춘 웨딩드레스야. 평소보다 한 치수 작게 만들었으니까, 오늘 밤부터 내일까지는 아무것도 먹지 마. 혹시라도 배가 나와서 입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많은 매체가 생중계하는 자리야. 괜히 우리 송씨 가문 망신시키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