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서주는 이제 막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라,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몰라. 연우한테 맡겼다가 혹시라도 상처라도 받을까 봐, 선뜻 맡기기가 겁이 나는구나."
"할머니, 제가 서주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데요. 어찌 섭섭하게 대하겠습니까?"
남연우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평소 차갑게 식은 눈빛에 드물게 온기가 감돌았다.
서류를 손에 든 강서연은 거실에 들어서자 마치 화산이 폭발하기 직전의 용암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 남연우는 강서연이 회사에서 더 단단히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연애 사실을 공개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야 주변 사람들이 그녀의 업무 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그동안 강서연은 남연우의 여자친구라는 이름으로 누릴 수 있는 어떤 특혜도 얻지 못한 채, 오로지 일에만 매달렸다. 잦은 야근에 머리가 핑 돌 만큼 어지러웠고, 고객 접대를 이어가다 위출혈까지 생겼지만, 그녀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서 있는 그녀는 마치 벌거벗은 광대처럼 느껴졌다.
남연우의 아버지는 경시 정계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고, 어머니는 남시 최고 부자의 외동딸로서 서정호 어르신의 수천억 자산을 상속권을 가지고 있다.
재계와 정계의 최고 가문이 결합해 맺어진 그 부부는, 평생 두 아이만을 두었다. 바로 남연우와 그의 여동생이었다.
그 중에서도 아들 남연우는 모두가 떠받드는 존재였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얼굴 한 번 보기조차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전해지는 고통에 강서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맞은편을 바라봤다.
수줍게 소파에 앉아 있는 차서주는 20대 초반의 나이로, 금방이라도 물기를 머금은 듯 싱그러웠다.
살짝 웨이브가 들어간 긴 머리가 어깨선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렸고, 7:3으로 가른 앞머리는 자연스럽게 양쪽 귀 옆으로 내려와 있었다.
전체적으로 조용하고 얌전한 소녀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청순하고 깨끗한 미모에 말도 많지 않았다.
남연우는 차서주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아 때때로 귓속말을 나누었다.
차서주의 얼굴에 피어 오른 홍조와 미소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강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남씨 가문에서도 남연우에게 여러 차례 맞선을 주선했지만, 그는 형식적으로 자리에만 응할 뿐이었다. 대개는 3~5일쯤 지나면 더 이상 연락조차 이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많이 달랐다.
남연우의 다리 위에 하얀색 곱슬머리 강아지가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털이 긴 동물을 싫어했다.
두 사람이 연애를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해, 강서연은 남연우의 생일 선물로 얌전하고 예쁜 랙돌 고양이를 선물했다.
하지만 남연우는 고양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강서연에게 당장 고양이를 돌려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동물을 집에 데려오면 함께 쫓아낼 것이라고 했다.
지금, 차서주의 강아지는 남연우의 다리 위에서 혀를 내밀고 눈을 가늘게 뜬 채 편안한 기색이었다. 남연우는 마디가 또렷한 손가락으로 그 등을 천천히 쓰다듬고 있었다. 마치 그 촉감을 즐기는 듯했다.
강서연의 시선이 깊어지며, 차서주를 뜯어보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
남연우와 연애를 시작한 이후로, 그가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양보하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정말 해가 서쪽에서 뜨는 날이 따로 없다고 느껴질 만큼이었다.
강서연은 가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마치 수많은 바늘이 심장을 꿰뚫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않았다.
남연우의 곁으로 다가간 그녀는 서류를 건네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목소리는 최대한 낮추고 차분하게 눌러 담았다. "공급사 쪽에서 계약서를 받아야 발주가 가능합니다. 더 늦어지면 납기에 차질이 생깁니다."
남연우는 뒤로 물러서며 그녀를 흘깃 쳐다보고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네가 올 곳이 아니야."
서류를 움켜쥔 강서연은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 "회장님께서 전화를 받지 않으시고, 메시지도 답이 없으셔서 직접 찾아왔습니다."
"연우 오빠, 이분은 누구세요?" 차서주가 고개를 내밀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강서연을 쳐다봤다. "정말 예쁘게 생겼네요."
"칭찬 감사합니다. 저는 남씨 그룹 홍보팀 부장 강서연입니다." 강서연은 차서주를 향해 싱긋 웃으며 다시 남연우를 돌아보고 업무를 보고했다.
"이번 주말 저녁, 임씨 그룹 이사장의 외아들이 결혼식을 올릴 예정입니다. 장소는…"
강서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연우가 불쾌한 기색으로 말을 끊었다. "네가 대신 가. 난 그날 시간 없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미숙 노부인도 위엄 있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연우야, 앞으로 일거리는 집으로 가져오지 마라. 외부인이 함부로 남씨 저택을 드나들게 해서야 되겠니? 네 아버지가 알면 또 너를 꾸짖을 게다."
노부인은 장인이 수놓은 치파오에 제왕록 비취 장신구를 세트로 갖춰 착용하고 있었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자연스러운 위엄이 실려 있었다.
남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할머니. 아랫사람이 눈치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다시는 들이지 않겠습니다."
그 말에 강서연은 순간 몸이 휘청거렸다. 남연우는 회사에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남씨 저택으로 찾아오라고 했다.
출장 가기 전까지 그녀와 꿀이 떨어지던 남연우는 지금 한 노부인이 말하는 '외부인'이라는 말을 묵인했다.
남연우는 계약서 마지막 페이지에 빠르게 서명하고 강서연에게 던진 다음, 물티슈로 손을 깨끗하게 닦았다.
"앞으로 나를 못 찾으면, 서류는 정문 경비실에 맡겨."
강서연은 확신하지 못했다. "중요 서류도 말씀이십니까?"
남연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더니 꾸짖었다. "오늘따라 말이 많네."
한미숙은 강서연을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었지만,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 눈빛에 지나치게 많은 것이 담겨 있어,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다.
이내 그녀는 남연우를 향해 싱긋 웃으며 부드럽게 일렀다. "일 얘기만 하지 말고, 서주 좀 챙겨라."
남연우는 시선을 거두고 탁자 위에 놓인 떡을 집어 차서주의 입에 가져다 댔다.
"이것 좀 먹고 있어. 금방 식사 준비될 거야."
남연우의 다정한 행동을 지켜보는 강서연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졌다. 마치 이 고풍스럽고 위엄 있는 저택에서, 자신만이 유일하게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