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첫 경험은 반드시 사랑하는 남자에게 바쳐야만 하는 걸까?
극심한 고통을 느끼는 순간, 임하늘은 자신에게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낯선 남자의 침범에 그녀는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로 울며 도망치려 했지만, 혼미한 몸에는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현실에 굴복하고 절망에 잠식당했다.
더 이상 도망칠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임하늘은 이를 악물고 연약함을 감추며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콘돔은 껴요."
그녀의 몸 위에 있던 남자는 그 말에 잠시 멈칫했지만, 아무 말 없이 더욱 거칠고 무자비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게 모든 것이 끝났다.
마지막 남은 힘까지 모두 빼앗긴 임하늘은 혼절하듯 잠에 빠졌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스위트룸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흐트러진 침대와 쑤시는 몸은 어젯밤의 모든 일이 현실이었음을 일깨워 주었다.
교묘하게 계획된 접대 자리에서 그녀는 거의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셨고, 이곳으로 보내져 낯선 남자에게 능욕을 당한 것이었다.
위급한 순간,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던 그녀는 그날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 이준재를 떠올렸다. 그에게 수없이 구조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었다. 마지막 통화에서 그가 드디어 받았지만, 돌아온 것은 "나 바쁘니까 경찰에 신고해."라는 한마디뿐이었다.
지금까지도 임하늘의 뇌리에는 그의 무정하고 냉담했던 말이 계속 맴돌았다.
뼛속까지 시리고 심장을 꿰뚫는 듯한 그 말은 그녀의 수년간의 사랑과 존엄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눈가의 비애는 점차 무감각으로 변해갔다.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명함 한 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임하늘은 잠시 멈칫하다가 손을 뻗어 그것을 주웠다. 그 위에 적힌 특별한 글자를 확인하는 순간, 그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이씨 그룹.
어젯밤은 너무 어두워서 그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그가 이준재 수하의 사람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다면 이 계략은 이준재와도 관련이 있는 걸까?
……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별장으로 돌아온 임하늘은 현관에 놓인 익숙한 신발과 외투를 보고 이준재가 돌아왔음을 알았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멈춰 섰다.
그녀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천천히 위층으로 올라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이준재는 목욕 가운을 단정하게 여몄음에도 그 귀한 기품을 감출 수 없었다. 젖은 이목구비는 냉철하고 차분하여 독특한 매력을 풍겼다.
임하늘을 본 이준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깊은 눈빛에는 냉담함인지 혐오인지 분간할 수 없는 기색이 서려 있었다. "무슨 일이지?"
임하늘은 그를 바라보았다.
신분 차이가 너무나 큰 두 사람은 애초에 맺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3년 전, 이성열 회장이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임하늘이 골수를 기증했고, 병이 나은 후 노인은 그녀에게 감사하며 조건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임하늘은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빌미로 이준재와 계약 결혼을 했다.
그때의 그녀는 너무 어렸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뜨거운 열정 하나만으로 그가 아무리 얼음산이라도 자신의 온기로 녹일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준재는 그녀의 그런 급공근리를 혐오했다.
그는 그녀의 속셈을 증오했기에, 3년간의 결혼 생활 동안 이 신혼집을 그저 잠시 묵는 호텔 정도로만 여겼다. 그녀의 지극정성인 보살핌을 누리면서도, 단 한 번도 그녀를 아내로 대한 적이 없었다.
임하늘은 전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집안의 변고로 너무 많은 책임을 짊어진 그녀는 그에게 의지하는 것 외에도 그의 사랑을 탐했기에, 이준재의 냉담함에도 늘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어젯밤 일을 겪은 후, 임하늘은 더 이상 사랑할 힘이 없었다.
이준재가 가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씨 가문과 관련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본래 의분에 차올라 그에게 해명을 요구하려 했지만, 그 답은 스스로 굴욕을 자초하는 꼴이 될 게 뻔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여전히 잠겨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준재 씨……"
이준재는 그녀를 무시하고 옷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무심코 집어 든 옷은 임하늘이 그를 위해 정성껏 코디해 둔 것이었다.
그의 뒷모습은 냉혹했고, 목소리마저 무정했다.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내려가서 아침이나 차려. 30분 뒤에 나가야 하니까."
하지만 임하늘은 미동도 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이준재 씨, 우리 이혼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