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동안 권하준 전무의 그림자로 살며 그를 짝사랑했다.
하지만 납치범들이 내 목숨을 담보로 몸값을 요구했을 때, 그는 협상을 거부했다.
그가 나를 버린 그 일주일 동안, 나는 짐승의 먹이를 먹으며 지옥을 견뎠다.
가까스로 탈출해 피투성이 맨발로 돌아온 나를 보며, 그는 안도 대신 미간을 찌푸렸다.
"역겨운 냄새가 나. 가까이 오지 마."
그는 걱정은커녕 내 몸이 차를 더럽힐까 봐 나를 발로 걷어찼다.
그의 약혼녀는 내 몰골을 비웃었고, 양부모님조차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알고 보니 납치범들이 요구했던 몸값은, 내 친부모님이 남겨주신 내 결혼 자금이었다.
그는 내 돈으로 내 목숨조차 구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그를 사랑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잠든 사이, 나는 2층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직전, 단단한 팔이 나를 받아냈다.
나를 구하러 왔던 유일한 사람, 설병현 경호팀장이었다.
나는 피 묻은 손으로 품에 있던 카드를 꺼내 그에게 쥐여주었다.
"이거, 제 결혼 자금이에요."
"팀장님 족보에 제 이름을 올려주세요."
제1화
한비연 POV:
나를 납치했던 괴한들보다, 죽음의 문턱에서 나를 버린 그가 더 잔인했다. 그 배신감은 올림픽대로 위를 피투성이 맨발로 걷는 고통보다 더 생생하게 나를 짓눌렀다.
일주일 만이었다.
세상이 온통 나를 향해 불을 뿜는 것처럼 느껴졌다.
구급차의 빨간 불빛, 경찰차의 파란 불빛, 그리고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가 밤하늘을 갈랐다.
나는 그 모든 빛의 한가운데 서 있었다.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고통도, 슬픔도, 심지어 분노조차도.
내 안의 모든 감정은 이미 진흙탕 속에 파묻혀 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그저 텅 빈 껍데기 같았다.
내게서 도망쳐 나온 것인지, 아니면 나를 버리고 떠나간 것인지 알 수 없는 영혼이 없는 채로.
"한비연 씨 맞으십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 눈앞에 선 사람은 KW 그룹 경호팀장 설병현이었다.
그는 늘 깔끔한 정장 차림이었지만, 오늘은 어딘가 초췌해 보였다.
나를 발견한 그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놀라움, 안도, 그리고… 슬픔.
나는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항상 내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그림자 같았지만, 가끔씩은 내 앞을 가로막기도 했다.
나는 기억했다.
그가 권하준 전무의 지시에 따라, 나를 전무님 방에서, 서재에서, 심지어는 전무님 차에서 '정중하게' 끌어냈던 수많은 순간들을.
그때마다 그는 늘 무표정했지만, 나는 그의 눈빛 속에서 미묘한 불편함을 읽어냈다.
마치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역겨운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전무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는 나를 향해 손짓했다.
저 멀리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서 있었다.
나는 시선을 돌렸다. 차 안은 어둠에 잠겨 있어 내부를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 안에 누가 있을지.
설병현 팀장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 굳어 있었다.
나의 몰골을 직접 확인한 후인 것 같았다.
"한비연 씨, 괜찮으십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묻어났다.
괜찮냐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다.
맨발이었다.
피범벅이 된 발자국이 아스팔트 위에 선명하게 남았다.
그 발자국은 마치 내 몸에서 흘러나온 피의 흔적처럼 보였다.
피를 흘리는 발이 아팠지만, 그 통증은 내 안의 거대한 공허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런 고통쯤은 이미 익숙했다.
며칠 동안 겪었던 지옥 같은 시간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웃어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너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병현 팀장이 다가와 나를 부축하려 했다.
나는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가 나를 불쌍하게 여길까봐 두려웠다.
어쩌면 그는 내가 이렇게 돌아온 것을 권하준 전무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나를 버린 그에게는 차라리 내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것이 더 나았을 테니까.
나는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차 안으로 들어갔다.
권하준 전무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완벽했다.
그는 늘 그랬다.
나를 짝사랑하는 것은 내 몫이었고, 그는 그저 그 완벽함 속에 안주하고 있었다.
내가 사라진 일주일 동안, 그는 아마 난생 처음 느껴보는 평화를 맛보았을 것이다.
적어도 내 그림자가 그의 곁을 맴돌지 않았으니까.
차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권하준 전무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시선이 공중에 멈췄다가, 이내 내게 향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 흔들린 것이 아니라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마치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듯이.
"누구…세요?"
그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차갑게 얼어붙은 칼날 같았다.
나는 내 이름을 말했다.
내 목소리는 너무나도 작아서, 내가 말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눈에 나는 그저 그의 곁을 맴도는 하찮은 그림자에 불과했으니까.
그는 늘 나를 그렇게 대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창밖의 풍경은 흐릿하게 지나갔다.
그는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내 몸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를 느꼈다.
일주일 동안 씻지도 먹지도 못했다. 화장실도 가지 못했다.
그는 코를 찌푸렸다.
불쾌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꼴이 이게 뭐야."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나는 그가 내 몰골이 보기 싫다는 뜻으로 한 말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전무님.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나를 감금했던 괴한들처럼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그가 알 바 아니라는 듯이.
그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순해졌군. 유승연 씨의 말이 맞았어."
나는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순해졌다고? 누구 때문에?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부드럽게 출발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뭘까. 유승연 씨의 말은.
그는 문득 손을 뻗었다.
내 몸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마치 차가운 칼날이 내 목을 겨누는 듯한 공포가 밀려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윽!"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는 내게서 나는 냄새를 맡은 듯,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더러운 냄새가 나."
그의 목소리에는 역겨움이 묻어났다.
나는 그제야 내 몸에서 나는 냄새를 다시 한번 느꼈다.
역겨웠다.
그는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차 바닥에 엎드렸다.
"차를 더럽힐까봐… 죄송합니다."
나는 그에게 애원했다.
그는 나를 발로 찼다.
"앉아!"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나는 그의 분노가 내게 향한 것인지, 아니면 내 몸에서 나는 냄새에 대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내 무릎은 말을 듣지 않았다.
무릎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납치범들이 나를 무릎 꿇리고 때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들은 내가 권하준 전무의 몸값 협상을 지연시키는 바람에 화가 났다고 했다.
나는 그 모든 고통을 권하준 전무 때문에 겪어야 했다.
나는 다시 한번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내 몸은 그대로였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그에게서 나는 악취를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소리쳐도 그는 들을 리 없었다.
나는 울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읍…"
나는 간신히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나를 보았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는 내게 건넸다.
"닦아."
그의 목소리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나는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손수건은 너무나도 깨끗하고 하얬다.
내 손에 들린 손수건은 마치 내 몰골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도구 같았다.
나는 손수건을 꽉 쥐었다.
백미러 속 설병현 팀장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내 얼굴은 이미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그에게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내 몰골은 너무나도 추악했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차 안에 갇혀 있었다.
나는 울음을 참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내 몸은 이미 마비된 듯했다.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그의 차 안에 갇힌 채로, 그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