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더욱 깊어졌다. 은빛 달빛이 천천히 통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려 한데 뒤엉킨 두 사람의 실루엣 위로 고요히 내려앉았다.
거칠고 뜨거운 입맞춤에 온 방 안에 짙은 욕망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남자는 순간 멈칫했다. 그는 깜짝 놀란 듯한 눈빛으로 자신의 몸 아래에 깔려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뭐야, 처녀였어?'
하지만 여자는 다시금 그의 품에 몸을 맡겼다. 유혹과 청초함이 공존한 그 물기 어린 눈빛, 그 어떤 말보다 사람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약 기운과 본능이 마지막 방어선까지 무너뜨렸고 남자는 더는 이성을 유지할 수 없어 낮게 신음을 토하더니, 그녀와 함께 욕망의 절정으로 나아갔다.
밤은 그렇게 지나갔다.
밝은 아침 햇살 아래, 김이서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는 옆에 누워 있는 남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햇살 속에서 신성함마저 감도는 조각 같은 얼굴이었다.
전날 밤의 격렬했던 기억이 문뜩 떠오르자, 김이서는 마치 꿈을 꾼 듯 얼떨떨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토록 수년 동안 지켜온 순결이 이렇게 무너졌다니? 심지어 상대는 다름 아닌 호스트였다.
처음엔, 친구가 자신을 위해 남자 호스트를 불렀다고 하니, 김이서는 그저 장난일 거라고, 진심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런데 그 말이 진심이었을 줄이야? 술기운과 집에서 쫓겨난 충격이 겹쳐 몽롱한 상태에서 엉겁결에 그 남자와 하룻밤을 같이 한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 잘생겼으니 손해는 아니지."
김이서는 그의 빼어난 얼굴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잠시 후, 김이서는 손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팔에는 붉게 긁힌 자국이 가득했고 남자의 가슴과 목 언저리에도 그녀 못지않게 전날 밤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의 어젯밤이 얼마나 뜨거웠고 격렬했는지 알 수 있었다.
김이서는 그 남자를 깨우지 않고 조용히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 블랙 카드를 하나 내려두곤 소리 없이 방을 빠져 나왔다.
문이 닫히는 순간, 잠들어 있던 남자가 번쩍 눈을 떴다. 그런 그의 눈빛엔 날카로운 광채가 스쳤다.
그는 반쯤 몸을 일으켰다. 윤곽이 뚜렷한 가슴과 복근, 햇살 속에서 차갑고도 매혹적인 분위기가 뿜어져 나왔다.
"인사도 없이 떠나다니, 참 매정하군."
그는 옆 테이블에 놓인 카드를 힐끗 보더니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날 남자 호스트로 착각한 거였어? 재미있네."
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창가로 다가가 전화를 걸었다. 완벽에 가까운 신체 비율은 햇살 속에서 마치 신이 빚은 예술품처럼 빛나고 있었다.
"나야."
전화가 연결 되자마자 용건부터 전했다.
"한 여자에 대해서 알아봐."
마침 그 순간, 김이서는 오픈카를 몰고 통 유리창 앞을 지나고 있었다.
차 안,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그녀의 긴 머리가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고 표정엔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하룻밤의 광란에 마음속에 억압되어 있던 불쾌한 감정들이 모두 녹아 내린 듯했다.
후회하냐고?
김이서는 자신이 내린 모든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었다.
유일하게 후회하고 있는 건, 부모님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좋은 딸 노릇을 해오며 참고 견뎌야 했던 지난 날에 대한 억울함이었다.
부모님이 공부하라 하면 김이서는 늘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연애는 아직 안 된다 하면 그녀에게 고백했던 남자들을 전부 거절했었다.
때문에 어젯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김이서는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오직 그들의 칭찬 한 마디, 인정을 받고 싶어서 숨이 막히도록 노력하며 살아왔는데...
결국 돌아온 건 무관심과 점점 더 가혹해지는 요구뿐이었다.
처음엔 부모님이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에 그렇게 엄격하게 대하는 건 줄 알았지만 며칠 전, 그들이 친딸을 찾으면서 그 모든 기대가 무너지고 말았다.
김이서가 애를 써도 얻지 못했던 사랑과 인정을, 친딸은 겨우 몇 마디 상냥한 말만으로 단숨에 얻을 수 있었다.
가장 우스웠던 건, 어젯밤 깨진 꽃병이었다.
분명 그들의 친딸이 깬 것임에도, 그저 그녀의 말 한마디로 꽃병을 깬 사람은 김이서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김이서는 그 대로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예전엔 그토록 엄격했던 통금시간조차 친딸이 돌아온 순간 오직 김이서만을 위한 통금시간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끼익.'
어느새 김이서는 윤씨 가문 저택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문 앞에 내팽개쳐진 자신의 짐이 눈에 안겨왔다.
"김이서. 넌 이제 윤씨 가문에서 쫓겨났어."
윤은채는 팔짱을 낀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기고만장하게 턱을 치켜든 그녀의 모습은 마치 싸움에서 이긴 암 닭 같았다.
김이서는 차가운 얼굴로 바닥에 내팽개쳐진 짐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날 이 집에서 쫓아내고 싶었어?"
"당연하지. 네 얼굴만 봐도 역겨워. 그 동안 네가 내 신분으로 부잣집 아가씨 행세를 하며 수년간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만 생각해도 지금 당장 널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어. 왜 너 같은 가짜 딸이 이런 행복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던 거냐고."
윤은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덧붙였다.
"이제 내가 돌아왔으니 너 같은 가짜는 멀리 멀리 꺼져줘야 해."